서울 
강릉 
광주 
제주 
목포 
)
고정의의 활약으로 요동에 갇힌 채 7월을 맞은 당 태종은 매우 초조했다. 그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찾기 위해 장손무기를 비롯한 장수들을 소집했다.
당 태종은 장수들이 모이자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나 요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고구려 유격대의 기습 공격으로 우리의 보급로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한시라도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세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정의는 아군과 정면으로 승부를 겨룰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배후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안시성 공략에 집중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그곳으로 집결시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십시오.”
“신성에 대한 공격은 중단하라는 말이냐?”
당 태종의 날 선 물음에 이세적은 단호히 대답했다.
“신성은 단시일 내에 함락시키기 어렵습니다. 강하왕 도종이 비록 뛰어난 장수이기는 하지만 그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곳으로 불러 안시성을 공격하는 데 힘을 보태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태종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건안성을 먼저 치는 게 낫지 않을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장손무기가 끼어들었다.
“안시성과 건안성, 이 두 성을 모두 점령해야 합니다. 다만, 순서를 정하자면 안시성이 먼저라는 얘기지요.”
당태종은 시선을 장손무기에게 옮겼다.
“그 이유가 무엇이오?”
“현재 우리가 보유한 군량은 전부 요동성에 있습니다. 그 아래 있는 안시성을 두고 남으로 내려가서 건안성을 공격하면 보급로가 너무 길어집니다. 안시성의 군사들이 우리 보급로를 차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듣고 보니 장손무기의 말이 그럴듯했다. 이세적은 물론 다른 장수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안시성은 백암성보다 험하지는 않지만 그곳의 성주인 양만춘은 매우 뛰어난 자였다. 성을 함락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건안성을 점령하면 안시성은 고립무원에 빠질 테니 제아무리 뛰어난 양만춘이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신하들 앞에서 일개 고구려 성주가 두려워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 태종은 고집을 피웠다.
“건안성을 함락시키면 안시성은 자연히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장손무기를 위시해 여러 장수가 다시 간했다.
“안시성을 두고 건안성을 치는 것은 적을 등에 태우고 앞으로 달리는 격입니다. 정 신경이 쓰이신다면 장량에게 명해 건안성을 공격하게 하고, 우리는 안시성에 집중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든 장수가 이구동성이었기에 당 태종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좋다! 당장 장량에게 사람을 보내 건안성으로 가라 전하라. 우리는 안시성을 친다.”
명을 받은 장손무기는 비사성에 있는 장량에게 전령을 보내 건안성을 공격하라 명하고, 신성에 가 있는 도종은 본대에 합류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당군은 안시성을 향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도종이 돌아오자 당 태종은 안시성 동쪽으로 군사를 집결시켰다. 그는 도종의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성으로 쳐들어갔다.
안시성의 주변 지형은 보기보다 훨씬 험준했다. 성의 군사들은 힘겹게 성벽을 오르는 당군을 향해 쇠뇌를 당기고, 바위와 통나무를 던졌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당군이 화살에 맞고 바윗돌에 부딪혀 죽었다.
당군은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지만 안시성 군민이 합심하여 발 빠르게 대처했기에 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은 장본인은 성주 양만춘이었다.
양만춘은 심지가 곧고 배포가 큰 인물로 아랫사람을 제 몸처럼 아꼈다. 그래서 군민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수효가 압도적으로 많은 당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성주를 믿고 똘똘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저항했다.
당군이 한차례 공격을 마치고 물러가자 양만춘은 군민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우리의 성은 천혜의 요새다. 당군이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우리가 대동단결하면 물리칠 수 있다. 머지않아 평양에서 구원군도 올 것이다. 지금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길어야 두 달만 버티면 된다. 곧 요동에 매서운 추위가 닥쳐오면 저 미련한 이세민은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주의 가슴 벅찬 연설에 안시성의 군민들은 환호했다.
다음 날, 양만춘은 욕 잘하는 군사들을 뽑아서 성벽 위에 세웠다.
그들은 성 밖에 포진하고 있는 당군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세민은 아비를 유폐시킨 불효자다!”
“이세민은 친형과 동생을 죽인 패륜아다!”
“이세민의 아비 이연은 수나라를 배신한 역적이다!”
“당군은 요택에서 전부 죽는다!”
이를 들은 태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안시성을 함락시키면 어리거나 늙거나 따지지 않고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겠다.”
이 말이 성에 전해지면서 안시성 군민은 더욱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게 됐다.
당군이 공격을 펼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안시성은 끄덕하지 않았다. 당군의 사상자만 늘어갈 뿐이었다.
당 태종은 선봉장인 도종을 불러 질책했다.
“벌써 열흘이 흘렀다. 그런데 안시성은 여전히 굳건하구나. 대관절 무엇을 한 거냐?”
도종이 쩔쩔매며 아뢰었다.
“소장에게 달리 생각이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 토산(土山)을 쌓는 겁니다. 통나무를 베어 뼈대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흙을 채워 성벽보다 높게 쌓으면 성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화살로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계책이었다. 당 태종은 도종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안시성 동남쪽 성벽 앞에서 느닷없이 토목 공사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당군은 주위에 있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날랐다. 성벽 앞에 벌채한 굵직한 나무들이 산을 이루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아름드리나무의 곁가지를 쳐서 통나무를 만든 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땅에 깊숙이 박았다. 그다음, 가는 나무들을 잇대어 통나무 기둥들을 서로 연결했다. 열흘도 지나지 않아 토산의 뼈대 공사가 끝났다.
성벽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양만춘은 코웃음을 쳤다.
“저 도적들이 토산을 만들려는 모양이다. 즉시 염초를 던지고 불화살을 날려라.”
성 위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목재 구조물로 염초 뭉치를 던졌다. 곧이어 수백 발의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불덩이가 토산의 뼈대 주변에 널린 염초 뭉치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더니 통나무 기둥으로 옮겨붙었다.
불길을 보고 놀란 도종은 군사들과 함께 진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이때였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1000여 명의 고구려군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창과 날선 도끼가 들려 있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당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벴다.
불시의 습격에 놀란 당나라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에 바빴다. 고구려군이 당군의 뒤를 쫓으며 유린했다. 당 태종이 구원군을 보내 주지 않았더라면 도종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 당군은 2000여 명의 군사가 죽거나 화상을 입었다.
토산의 구조물도 반 이상 타서 쓸 수 없게 됐다.
그러자 태종은 작업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군사를 두 대로 나누어 일대가 안시성을 공격하는 사이 나머지 부대가 토산을 쌓는 것이었다.
당군은 하루에도 여려 차례 안시성을 공격했다. 그러면서 토산도 차츰 높이를 더해 갔다. 그런데 공사를 하도 서두르다 보니 꼼꼼히 할 수가 없었다. 불탄 나무를 뽑고 일일이 새로운 나무를 박아야 하는데, 대충 날림으로 진행했다.
안시성의 군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군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토산 쌓는 것을 견제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토산 축조는 빠르게 진행됐다.
한편, 비사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량은 마음이 조급했다. 이미 여러 차례 당 태종으로부터 건안성을 치라는 명이 하달됐지만 고구려 함선이 비사성 앞바다에 자주 출몰했기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장량은 수하 장수들을 모아 의논했다.
“폐하께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건안성 공격을 재촉하셨소.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소.”
부총관 상하(常何)가 상기된 얼굴로 나섰다.
“온사문이 이끄는 고구려 해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등주에서 출발한 식량 수송선이 벌써 여러 차례 그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비사성을 비우고 건안성으로 나아간다면 고구려 해군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이는 단순히 성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제해권을 상실하는 겁니다.”
장량이 난색을 보였다.
“그렇지만 어떡하겠소. 폐하의 지엄한 명이니 더는 건안성 공략을 미룰 수 없소.”
방효태(龐孝泰)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주력군이 건안성으로 이동한 것을 온사문이 알게 되면 비사성 앞바다는 다시 고구려군의 차지가 될 겁니다.”
장수들이 고심하고 있을 때 장문간이 대안을 내놓았다.
“군사를 일부 남겨 두고 떠나십시오. 제가 이곳에 남아 성과 바다를 지키겠습니다. 비사성은 견고한 철옹성이니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안심되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그 방법뿐이었다.
대총관은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장군께 이곳을 부탁하겠소. 고구려 해군은 만만치 않은 상대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오.”
방효태가 끼어들었다.
“건안성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참으로 앞일이 걱정입니다.”
“일단 부딪혀 보면 대응책이 떠오르겠지요.”
수장을 위로하는 부총관의 말이었지만 그 역시 확신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비사성을 떠난 장량의 부대는 바닷길을 따라 건안성으로 향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