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금배지의 무게와 내뱉은 공약의 가벼움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데스크칼럼

김준구 산업경제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4-10 00:02:40

살다 보면 약속을 밥 먹듯이 쉽게 어기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상대를 만만하게 보거나 얕잡아 보기도 하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약속을 자주 깨다 보니 아예 습관이 된 사람도 많다. 사과 한 번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약속을 깨 놓고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신의를 잘 어기는 사람들에겐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휴대폰에 불이 나도록 연락하며 무언가를 얻어 내려 하지만 정작 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친형제·자매 이상으로 살갑게 다가오다가도 볼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가 언제 알았느냐’는 식으로 매몰차게 인연을 끊기도 한다. 이게 다 인지상정이거니 생각하려 해도 괜히 울화가 치밀고 인간적인 배신감마저 든다.

옛 역사나 문헌을 보면 약속이나 신의와 관련된 말이 자주 나온다. 요즘 세태로 보면 융통성 없거나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신용이 중시되는 걸 보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초나라의 장수였던 계포(季布)다. 그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그 지켰다는 데서 유래해 생겨난 말이 ‘계포일락(季布一諾)’이다. 쇠나 돌에 빗댄 금석맹약(金石盟約)이나 단금지계(斷金之契)도 같은 의미다.

대한민국에서 약속을 가장 잘 깨는 직업을 고르라 하면 ‘정치인’이 단연 1등이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직업별 신뢰도 조사를 한 결과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공무원의 절반, 기업인과 문화·예술인의 3분의 1 수준으로 가장 낮았다. 올해 초 한국교육개발원이 공개한 ‘2023 교육정책 인식 조사’에서도 우리나라 중·고생 사이에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오늘은 나라 살림과 법의 제·개정 등 막강한 권한을 갖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투표일이다. 오후 6시가 되면 출구조사 발표와 실시간 개표 상황이 이어지면서 정당별로 희비가 갈릴 것이다. 후보자들의 표정도 극과 극을 달릴 것이다. 선거에 패한 후보자들이야 다음 선거를 기약하거나 생업에 종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22대 국회에서 금배지를 달게 될 당선인 입장은 상황이 다르다. 지역 주민에게 약속했던 공약들이 실행만을 기다리며 그대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선 각 정당과 지역 후보자들이 쏟아 낸 ‘경제 공약’이 유난히 많았다. 지역 혐오시설을 지역구 밖으로 빼내겠다고 약속한 후보들이 있는가 하면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며 각종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후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재건축·재개발로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겠다고 공약한 후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실현 가능성은 뒷전이고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의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도 흔했다. 전국 곳곳에 걸렸던 선거 플래카드가 이를 잘 보여 줬다.

이와 관련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정당별 공약에 대한 분야별 전문가 평가 결과를 종합해 발표했다. 이 자리에선 정당들이 내놓은 공약 대부분이 실현 가능성이 부족한 구호성·선심성 공약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구체성이 결여된 구호성 공약이 많았고, 재정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 공약도 많았던 것으로 평가했다. 유권자들이 세밀하게 공약을 살펴야 하고, 선심성 지원 공약은 더욱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총선에선 여야 간에 불꽃 튀는 선거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후보자들 또한 온갖 핑크빛 공약을 쏟아 내며 엎드려 큰절까지 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오늘 이후 당선이 확정된 이들은 자신의 공약이 여전히 지역 주민의 뇌리에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주민들을 희망 고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스스로 당선을 전제로 지역 주민에게 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국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면 국민은 다시 노예로 전락한다’고 했다. 투표할 때만 상전이었다가 투표가 끝나면 바로 처지가 바뀌는 현실은 지금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선 4년 임기 동안 당선인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지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했던 주민 숙원 사업이나 경제 공약을 지키지 않는 당선인이라면 다음 총선에선 과감하게 솎아 내면 된다.

정치판에선 ‘당선인들이 선거 공약만 제대로 지키면 전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되고도 남을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계포 같은 약속의 달인은 못될지언정 자신을 뽑아 준 주민과의 약속을 생각해서라도 거짓말쟁이가 돼선 안 될 일이다. 한 표가 아쉬워 폴더 인사를 하던 때를 잊지 말고 주민에게 약속했던 공약들부터 챙겨야 한다.

지금은 선거 기간 내내 굽신거렸던 허리를 펼 때가 아니다. 금배지의 무게를 느끼며 주민과의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궁리할 때다. 최소한 다음 번 선거에 또 나올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지역 주민의 수많은 눈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김준구 산업경제부장·부국장 jkkim@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