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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칼라스 사건’ 바로잡은 볼테르와 페르네이성
알프스와 몽블랑의 절경이 수려하게 내다보이는 곳
‘노마드’ 볼테르가 포도밭 가꾸며 말년을 보내다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9 06:31:0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 박사
볼테르는 모든 형태의 편견에 맞서 싸운 철학자다. 그의 최대의 적은 절대군주제·종교·사회적 불평등이었다. 그의 이런 사상이 총망라된 책이 깡디드(Candide)’. 볼테르 최고의 걸작인 이 책은 그가 몸소 체험한 사회·정치적 사건을 투영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759. 유럽은 이즈음 소용돌이의 연속이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다. 1755년 리스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목격한 볼테르는 지상의 악과 신의 존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철학서 깡디드. 신랄한 풍자를 담은 이 책은 볼테르가 랄프 박사라는 필명으로 써서 독일어로 번역해 발표했다.
 
주인공 깡디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을 통해 볼테르는 낙관주의와 종교, 그리고 그 대표자들을 암묵적으로 비판한다. 실제로 주의깊은 독자는 볼테르가 팡글로스로 의인화된 낙관주의와 마르탱으로 의인화된 비관주의 사이에 어떤 대립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의미심장한 책이 나온 지 2년 후 볼테르는 투사로서 사회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761년에 일어난 장 칼라스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아들의 가톨릭 개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개신교도 장 칼라스에 대한 사법 유린이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된 후 박해를 받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 중 다수는 프랑스 왕국을 떠나는 것이 금지됐음에도 망명을 선택했다.
 
▲ 장 칼라스 가족에게 지원을 약속하는 볼테르. Philippe-Nolasque Bergeret 작품. 프랑스 국립도서관
 
한편 툴루즈의 직물상인 장 칼라스의 가족처럼 가능한 한 신중하게 프랑스에 머물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칼라스의 장남 마크 앙투안 칼라스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목을 매 숨졌다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가족에게 불명예를 안기지 않으려고 아들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위장하려 했다앙시앵레짐(구체제·프랑스혁명 이전의 제도)하에서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사람들의 야유를 받으며 말에 끌려 거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기 때문이다종교적 광신주의에 휩싸인 비방꾼들은 장 칼라스를 가톨릭 개종을 막기 위해 장남을 죽인 범인으로 몰아갔다.
 
장 칼라스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판에 증인이 소환됐다. 17611118, 칼라스 가족(아버지·어머니·자녀)은 단서와 추정만으로 살인자로 기소됐다. 장 자크 루소의 친구이자 칼라스 가족의 변호사였던 로이소 드 몰레옹은 장 칼라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선고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장 칼라스는 구타당하고 심문을 받은 후 목을 졸려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딸은 수녀원에 감금됐다. 영구 추방형을 선고받은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피에르 칼라스는 제네바에서 볼테르를 만나 아버지가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호소했다.
 
▲ 페르네이의 성, 볼테르성으로도 불린다. 위키피디아
 
이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관심은 한층 커졌다. 결국 그는 장 칼라스의 미망인과 두 자녀를 자신의 거주지인 젝스의 페르네이 성으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는 이 사건이 불의를 넘어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종교적 편협함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즉시 조사에 착수했고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 사건에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압력 단체를 조직하고 재판 재심에 필요한 모든 문서를 수집했다. 1763 볼테르는 종교적 광신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한 관용(톨레랑스)에 관한 논고를 발표했다.
 
이 책으로 칼라스 사건은 큰 관심을 받고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볼테르는 루이 15세 국왕과 칼라스 가족의 면담을 성사시켰다. 그 후 재판은 전면 재검토됐고 투쟁 끝에 판결이 뒤집히는 역사적 쾌거를 이뤘다. 80명의 판사와 국왕 평의회는 장 칼라스의 복권을 결정했고, 176539일 마침내 무죄를 선고했다. 볼테르는 영웅이 됐다. 이때부터 볼테르와 칼라스는 근대 유럽을 기억하는 이정표이자 종교적 자유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볼테르의 나이 칠순을 넘긴 때였다. 이 노(老)철학자가 깡디드칼라스 사건을 승리로 이끈 ‘관용에 관한 논고를 쓴 곳은 페르네이 성이었다. 볼테르가 이 성을 인수한 것은 17592월. 그는 성의 일부를 허물고 제네바 건축가 장 미셸 빌롱의 도움을 받아 신축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
 
알프스와 몽블랑의 절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큰 테라스를 만들어 개방감을 높였고 테라스 아래에는 볼테르의 포도밭과 공원을 만들었다. 볼테르는 이 공원을 장식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공원은 페르네이 성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품이 됐다. 깡디드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우리는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농촌 생활에 대한 그의 찬사는 시적 관습이라기보다 깊은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페르네이 성에서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마지막 20년을 보냈다. 농부들이 경작하고 하인들이 준비한 과수원과 채소밭의 과일과 채소에 둘러싸여 살았다. 볼테르는 페르네이 성에 마을의 아담 신부가 머물 방을 마련해 주고 그와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체스를 두기도 했다.
 
페르네이 성은 볼테르가 세상을 떠난 후 벨 에스프리(아름다운 영혼)’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순례지가 됐다. 뒤마·플로베르·샤토브리앙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다녀갔고, 배우·변호사들도 영감을 얻으러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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