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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당나라 중종(中宗)은 시어사 장행급(張行岌)을 고려에 보냈다. 동모성에 도착한 사신은 대조영을 알현하고 고려와 선린 관계를 맺고 싶다는 중종의 뜻을 전했다.
대조영은 당의 사신이 물러간 뒤에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다.
“경들은 당주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로 임아상(任雅相)이 자신의 소견을 아뢰었다.
“저들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낸 이유는 폐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함입니다. 지금 당나라는 계속되는 정변으로 국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입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그 틈을 노려 돌궐과 함께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측천무후의 병세가 악화되자 당나라는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조영이 임아상에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응수해야겠소?”
“일단 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당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런 연후에 방심한 때를 노려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 됩니다.”
대조영은 흡족했다.
“그대의 계책이 합당하오.”
대조영은 당의 제의를 받아들여 화친을 맺고, 둘째 아들인 문예(門藝)를 보내 답례하기로 했다.
문예가 떠나기 전날 밤, 대조영은 아들을 따로 불렀다.
“당에 들어가면 관례에 따라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이는 사실 볼모와 다름없어서 아마 오랫동안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소자도 각오하고 있는 바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소서.”
문예는 의젓하게 부친을 위로했다.
대조영은 아들의 담담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그는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을 접고 냉철한 군주로 돌아왔다.
“장안에 가거든 당의 허실을 잘 살피도록 해라. 장차 너의 견문이 크게 쓰일 때가 있으리라.”
“명심하겠습니다.”
문예는 공손히 절을 하고 물러났다.
대조영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장자인 무예(武藝)와 차자인 문예가 가장 출중했다. 둘 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비슷했지만 대조적인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예가 성정이 강직하고 용맹하여 사람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는 데 비해, 문예는 온화하고 세심하여 주변을 돌볼 줄 알았다. 아버지가 보기에 무예가 군주의 기상을 갖췄다면 문예는 재상의 재목이었다. 그가 문예를 택해 당으로 보낸 이유도 친화력과 분별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문예가 당으로 떠나고 얼마 후 흑수말갈을 평정하기 위해 북변에 나가 있던 무예가 동모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왕이 당과 화친을 맺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무예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정전에 들어섰다.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고 있던 대조영은 전갈도 없이 나타난 장자를 보고 이내 그 까닭을 짐작했다.
대조영은 냉랭하게 물었다.
“흑수부를 평정했느냐?”
흑수부는 말갈의 지류로 고구려 북쪽에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여러 말갈족은 세력이 약해졌다. 결국 이들은 모두 고려에 복속했지만 흑수부만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흑수부 사람들은 건장한 체격에 호전적인 성격으로 주변 마을을 약탈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달리다 못한 인근 부족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를 수락한 대조영은 무예를 보내 이들을 평정하게 했다.
“그들이 겁을 먹고 피해 다니는 통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렇다면 작전 중에 돌아왔다는 말이냐?
대조영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무예는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군령을 무릅쓰고 이리 달려왔습니다.”
무예의 의연한 모습에 대조영은 노기가 가라앉았다.
“좋다. 군령을 어긴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선 피치 못할 연유부터 들어 보자.”
“이번에 폐하께서 당과 화친을 맺는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렇다.”
대조영은 무예의 하는 양을 보기 위해서 선선히 대답했다.
“아버지를 죽인 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가 아닙니까. 산천에 뿌려진 겨레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건만 어찌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이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손을 잡고 희희낙락하는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무예는 비분에 차서 외쳤다. 그의 질타를 들은 신하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임금의 눈치를 살폈다. 비록 이치에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이는 국왕을 능멸하는 무례한 언사였다.
“네 말이 옳다. 우리는 선대가 당한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부왕이 순순히 동의하자 무예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대조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다. 당나라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을 이기려면 바위를 돌아 흐르는 시냇물의 유연성도 갖춰야 한다. 북변으로 돌아가라. 네가 그곳에서 나의 조언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훗날 우리는 당을 누르고 천하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무예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물러갔다. 정전 안은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회의가 끝나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도 임아상만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무척 심란해 보였다.
“짐에게 할 말이 있는가?”
왕이 묻자 임아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왕자는 두 가지 죄를 범했습니다. 첫째, 숙영지를 무단으로 이탈하여 군기를 어지럽혔고 둘째, 폐하 앞에서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음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이는 중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대조영은 임아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조정의 대신이기에 앞서 무예의 장인이었다. 그는 사위를 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대의 강직함을 모르는 바 아니오. 다만, 짐은 무예가 앞으로 고구려의 영화를 되살릴 거라고 믿소. 이번에는 비록 혈기가 앞서 분별력을 잃었지만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겠소.”
대조영의 의지는 단호했다.
“폐하의 뜻이 굳으시니 신은 그저 따를 뿐입니다.”
임아상은 무예에 대한 왕의 신뢰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북변의 군영으로 돌아온 무예는 흑수부에 대한 전략을 바꿨다. 그들이 주변 부족을 침략하는 이유는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말갈족 중 가장 북쪽에 사는 흑수부 사람들은 추운 날씨 탓에 농작물을 키우거나 가축을 기르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무예는 이를 고려해 흑수부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협상에 들어갔다.
무예는 흑수부의 족장들을 만나 고려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교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고려의 강경 대응에 겁을 먹고 있던 흑수부 족장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북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임무를 마친 무예는 도성으로 돌아와 부왕에게 성과를 보고했다.
끝까지 다 들은 대조영이 입을 열었다.
“군령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나 이번에 세운 공을 참작해서 특별히 용서하겠다. 당분간 네 잘못을 반성하며 근신해라.”
무예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무예가 처소로 돌아와 군장을 풀고 있을 때 임아상이 찾아왔다.
“이번 일로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수명이 십 년은 준 듯합니다. 폐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왕자를 용서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리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장인어른,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저도 이번 일로 배운 게 많습니다.”
무예는 이번에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흑수부를 무력 진압해야 한다고 고집했다면 아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왕자께 왕좌를 물려주실 생각입니다. 무릇 군주는 나라를 다스림에 힘이 아니라 덕을 내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왕의 자리에 오르신다면 이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무예는 장인의 충고를 가슴에 새겼다. 그는 전장에서의 경험과 현신들의 가르침을 통해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군왕의 도를 배워 나갔다.
서력 719년, 대조영이 타계하자 그의 아들 무예가 왕위에 올랐다. 무예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내 몸 같이 아꼈으며, 동정서벌(東征西伐)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 무렵부터 고려는 ‘발해(渤海)’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초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발해의 기세에 겁을 먹은 주변국들은 앞다투어 귀부를 자청했다. 발해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하게 된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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