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11] 어머니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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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입질 안 하는 서방 있다든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17 06:30:10

“그 나이에 무슨 팔자를 고치겠다고 하는지.”

내년이면 오십이 되는 사촌 언니가 이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녀의 어머니는 새파란 미역을 헹궈 체에 밭쳐 놓았다. 생일날이면 약간의 용돈이 든 봉투를 건네고 미역국을 끓여 주는 건 자식들의 생일마다 벌이는 어머니만의 전통 행사였다.

“오입질 안 하는 서방 있다든? 괜히 바람이야? 참으면 지나가는걸.”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탁탁, 체에서 물을 털어 냈다. 태풍처럼 모든 걸 무너뜨리고 뿌리째 뽑아 버리는 바람도 있다고, 하운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26년 살았는데 앞으로 또 그만큼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대.”

식탁에 앉아 어머니가 들기름에 재워 온 김을 가위로 잘라 반찬통에 넣으며 하운이 말했다.

“바다가 아무리 넓고 고기가 많아 봐라. 멀리 헤엄쳐 봐야 머잖아 지쳐 돌아오기 마련인걸. 뭐하러 이혼을 해? 이혼하면 뭐 별거 있다던. 자식들은 어쩔 거야?”

가윗날에 바스러진 김 조각들이 깔아 놓은 신문지 위에 점점이 내려앉았다.

“다들 대학 졸업하고 제 앞가림하는데 뭘.”

“아직 시집 장가 안 갔잖아. 혼사 막으면 어쩔 건데.”

“요즘 세상에 무슨.”

“부모 가슴 찢어 놓을 생각은 안 해? 나이가 여든이나 된 네 이모가 얼마나 속상해 하는지.”

“그걸 다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지.”

따박따박 반론을 하는 딸이 못마땅한지 흘끔 눈을 한번 흘기고는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요새 젊은것들은 참을성이 없어. 자식이 이혼하면 어미는 세상에 낯부끄러워 얼굴을 못 드는 거야.”

어머니는 불린 버섯과 쇠고기를 다진 마늘과 함께 참기름을 넣어 볶다가 물기를 뺀 미역을 넣어 다시 뒤적였다. 김 부스러기들을 쓸어 모으다 말고 하운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익숙하게 국을 끓이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뒷모습은 하운이 세상에 태어나 기억하는 최초의 스틸 컷이었다. 엉금엉금 방바닥을 기어다니던 하운이 문턱을 짚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는 지금처럼 주방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설거지였는지 도마질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기였던 하운이 등지고 있는 방은 환했다. 아기가 바라보는 부엌은 어두웠다. 동굴처럼 짙은 어둠 속의 어머니 뒷모습이 있었다. 1초도 걸리지 않고 더듬을 수 있는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끝까지 하운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랑? 네 아버지랑 난 그런 거 없다. 니들 불쌍해서 그냥 법으로 산 거야.”

어려서부터 그녀의 한 섞인 넋두리를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으며 자랐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재래시장 골목에서 댄스 교실을 운영했던 아버지에겐 20년 동안 손가락 발가락 모두 합쳐도 모자랄 만큼 여자들이 많았다.

“글쎄, 바람났다고 해서 쫓아가 보면 하나같이 좌판에 앉아 생선이나 팔고 푸줏간에서 고기나 끊던 것들이지 뭐냐. 그런 여편네들하고 뒹굴 맘이 나는지 원.”

그렇게 말할 때 어머니의 얼굴은 모멸감으로 한껏 일그러졌다. 자신과 비교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를 더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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