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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부대 업무 이관과 출국
한·미 양해각서 ‘미8군 정보훈령 I-65’가 ‘I-69’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미 502군사정보단이 해 오던 대방동 소재 수용소의 운영·관리 업무 일체가 국군 정보사령부로 이관되었다. 수용소 관리뿐만 아니라 심문 활동의 주도권도 국군 정보사령부로 이전되면서 모든 행정 절차를 비롯해 시설과 설비의 비품 등 관리·경비 업무 및 대외업무 일체를 국군 정보사령부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정보사령부 파견 대장인 김흥태 중령과 우리 부대 행정장교와 내가 함께 어울려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 작업은 1974년 5월에 종결되었다.
그 사이 나에게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와 내 가족에게 미국 정부로부터 SE-1 특별 이민비자가 발급된 것이다. 이 비자는 미국 정부에 대해 15년 이상 공로를 세운 외국인에게 주는 특별비자였다.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된 나는 서둘러서 집을 팔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임시 머물 셋방을 얻고는 딸과 두 아들의 이민·전학 수속을 했다.
부대에는 1974년 5월4일부로 사표를 냈다. 부대에서는 내가 미국에 들어가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추천장과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주었다. 미 502군사정보단의 심문관 생활이 끝나고 이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삶의 제2막 휘장이 내려가고 또다시 새로운 삶을 향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미 502군사정보단은 내가 떠난 얼마 후에 501군사정보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새 삶을 찾아 미국으로
1974년 5월10일, 나는 김포비행장에서 홀로 보잉747 점보여객기를 탔다. 우선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에 가족을 불러들일 셈으로 혼자 떠나게 된 것이다.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될지 모른다는 착잡한 마음과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러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들뜬 마음이 교차했다.
충남 부여 시골에서 농사일에 뼈가 굳은 촌놈이, 중학교에서 월사금 미납으로 퇴학을 맞은 가난뱅이가, 고아원에서 배가 고파 울던 멍청이가 미국 이민을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적 같기만 했다. 나 자신의 힘이나 처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볼 수 없는 어떤 강한 밧줄이 나의 몸을 묶어서 끌고 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아름다운 하와이에 비행기가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치자 그 자리에서 ‘그린 카드’라 불리는 영주권이 나왔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로스앤젤레스와 클리블랜드를 거쳐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선 연락을 받고 나온 친구 송현욱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송 집사의 집이 있는 메릴랜드주 아스펜힐로 가는 길, 연도엔 마치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훈훈한 봄바람 속에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나부끼고 있었다.꿈과 같은 일이었다….
힘들었던 이민 초기
송현욱 집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나는 백방으로 구직 활동을 했다. 내가 먼저 자리를 잡은 다음에 뒤따라오기로 해서 가족은 아직도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영주권은 받았지만 아직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 기관에는 절대로 취직이 안 되고 그 당시엔 일반 직장에도 취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내 보았지만 내가 보낸 구직 이력서는 전부 되돌아왔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자격자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회사에는 빈자리가 없고 신규 채용도 계획된 것이 없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리가 나면 꼭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거의 이런 식의 거절이었다. 거절치고는 참으로 상냥한 방법의 거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조급하고 초조했다. 한 달이 지나 6월 중순이 되었다. 처음부터 좋은 직장 구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아무 데나 가 보라는 친구의 충고를 듣고 우선 근처에 있는 서민 백화점 K-Mart를 찾아갔다.
그곳의 인사책임자는 아주 친절했다. 하지만 구직 이력서가 이미 16통이 들어와 있고 빈자리가 없다고 했다. 빈자리가 난다고 해도 내 차례는 17번째라고 했다. 한숨을 쉬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다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총지배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떼를 썼다.
마침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진 총지배인이 외부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총지배인인데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다.
나는 솔직하고 간결하게 용건을 말했다. 표정이나 태도로 보아 그는 분명히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내가 앞서 만났던 인사책임자를 불렀다. 그러나 인사책임자는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내 앞에 이미 16통의 이력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국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나 편법이나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다. 총지배인도 미안한 표정으로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자리가 생기면 꼭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그랬다가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래, 이 주먹으로 문을 한 번만 더 두들겨 보자!’
충청도 촌놈의 오기랄까, 갖은 고생을 다해 본 사람의 배짱이랄까 그런 게 내 속에서 불끈 치솟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면 포기하지 않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겐 그만 가 보라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뒤돌아 나올 여유가 없었다.
나는 다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총지배인의 사무실로 곧장 들어갔다.
나를 보자 총지배인은 깜짝 놀라 정색을 하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총지배인도 나를 귀찮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각한 태도로 단호하게 총지배인을 내가 설정한 코너로 몰고 갔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두들겨라
“총지배인님! 나는 이 나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현재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생소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합니다. 나에게는 당장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빈둥빈둥 직장도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가족이 아직 서울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을 빨리 데려와야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자리가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나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 주십시오. 절대로 급료를 요구하지 않겠으니 내일부터 무보수로 이곳에 출근하게 해 주십시오. 나에게 빗자루를 하나 주십시오. 가게 안팎을 매일 깨끗이 쓸겠습니다. 화초가게에서 물을 주겠습니다. 화물트럭이 들어오면 짐 내리는 일을 돕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시고 이다음에 자리가 생기면 내게 우선권을 주어 그곳에서 일하게 해 주십시오.”
총지배인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인사책임자를 다시 불렀다. 그러고는 이력서가 16통이나 들어와 있다며 완고하던 저들이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보석부의 리처드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그를 완구부로 보내고 이 사람을 내일부터 보석부 지배인으로 배치하게. 시간당 4.20달러일세.”
총지배인이 인사책임자에게 말했다. 나를 향해서는 “자네는 빨리 가족을 데려오도록 하게”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와! 드디어 취직이 되었다. 그때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2.50달러였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니 백화점 점원의 초봉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라고 했다.
‘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주먹으로 두들겨라!’
이후 나는 이 백화점에서 2년간 최우수 점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성심성의를 다해 열심히 일했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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