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정부는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기를 거쳐 남한 지역에 수립된 초대 정부로 그 국방정책은 대한민국 국방정책과 군사제도의 기원이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초대정부는 3년간의 미 군정기에 수립된 ‘국방사령부와 경비대’를 인수받아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고 각종 국방 관련 법령을 제정하는 한편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방정책과 군사제도의 틀을 형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경험한 대통령으로서 6·25 전쟁 시 그의 전쟁 지도와 경험은 정전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한반도 안보상황을 고려해 볼 때 큰 함의를 갖고 있다. 전쟁을 통해 보완된 이승만정부의 국방정책은 국토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산권에 대한 위험 인식은 청년기의 공로증(恐露症·Russophobia)에서 출발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 인식으로 전이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위험 인식은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쟁과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전략을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의 문제로 인식했고, 중공과 북한 등 공산 진영 국가의 모든 활동은 소련 공산주의 팽창 전략에 의해 지배되고 지휘를 받는다고 보았다.
그는 1945년 해방 후 미·소 군정기를 거친 한반도의 분할과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결과를 소련 팽창주의의 일환으로 보고, 주한 미군이 철수할 경우 소련의 지령에 의한 북한 공산군의 남침이 있을 것을 우려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국방정책의 기조는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3·1 독립정신으로 재건된 민주독립국가로서 항구적인 국제평화 유지와 자손 만대의 자유 행복을 확보하는 국제 간 친선유지와 평화 애호의 국시를 중심으로 모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며,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것을 헌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방정책의 기조를 이에 두고 시행했다.
당시 국방정책은 초대 국무총리를 겸직한 이범석 국방장관이 1948년 8월3일 천명한 시정방침에 ‘연합국방’이란 형태로 표현된 국가안보시책 내지 국방시책으로 제시되었다. 1948년 8월15일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 박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남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안보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정부수립 직후의 국방정책은 정부의 시정방침이라는 포괄적인 방침 내에서 그 방향이 결정되었는데, 국방공안시설의 건설에 필요한 경비를 제외하고는 연합 국방의 추진과 강력한 국방력 건설, 그리고 군 조직의 강화 및 조정 등이 그 주요 방침이었다. 국방정책의 목표는 신생 대한민국이 제한된 여건 속에서 민족적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군사력을 갖추는 한편, 반공이념에 뿌리를 둔 군의 사상적 통일을 이루어 사상군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광복군 최고지휘관으로 쌓은 군사지식과 진중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 방침을 착상했다. 그의 지도 방침 첫 번째인 사병제일주의는 정병주의에 입각하여 사병 개개인의 자질을 조속히 향상시켜 국군 전체의 질적 수준을 평준화함으로써 선진 민주국가의 우수한 군대와 대등한 자질을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병 양성의 대상과 범위를 현역 병사에 국한하지 않고 장차 군에 입대할 모든 청년 장정으로 확대해 애국애족 사상과 반공정신을 토착화함으로써 범국민적 정신 전력의 강화를 도모했다.
아울러 두 번째 지도방침으로 사상 통일과 반공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한 정훈 공작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미 군정 3년간의 민주화 시책을 틈타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의 각 주요기관 또는 경비대 내부에 침투해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망을 확대해 나가는 바람에 군의 안전 유지가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정부는 국방정책다운 정책을 정립하지 못한 채 북한의 침공을 받았다. 결국 당면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제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대미·대유엔 외교활동에 주력하면서 전시하의 국민 총력 체제를 갖추는 데 전력을 다했다.
6·25 전쟁 기간 이승만정부의 국방정책은 그 정책의 결정 절차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국가안보정책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중대한 정책 결정의 결과로 나타났다. 국방정책의 방향은 전쟁 이전의 북진통일론과 같은 정략적 명분론을 지양했다. 결국 전시하에서의 중대한 정책적 결정들로서 유엔군 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게 되었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노력이 뒤따랐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한국군 20개 사단 증설, 해·공군력 강화, 그리고 장기적인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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