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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깊숙한 곳 후원 구역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연못 향원지와 2층 정자 향원정이 있다. 경치에 취해 지나치기 쉽지만 눈 밝은 사람이라면 향원지 연못가에 세워진 ‘한국의 전기 발생지’ 표지석을 보았을 것이다. 돌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어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전소를 설립하여 1887년 3월6일 건청궁(乾清宫) 전등에 점화하고 경복궁(景福宮)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함으로써 이 땅에 비로소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향원지 너머 경복궁 가장 안쪽에 자리한 전각이 건천궁이다. 경복궁 수많은 전각 중에서도 건천궁에 첫 전기가 들어온 것은 이곳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활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건천궁은 궐내 다른 전각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아 오히려 눈에 띄는 곳이다. 고종은 건천궁을 지으면서 특별히 내탕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내탕금이란 왕의 개인 돈을 말한다.
고종 정치 자립의 상징 건천궁
건천궁이 지어진 해는 1873년.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를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건청궁은 고종 개인에게 정치 자립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건청궁은 내부도 일반 사대부의 저택처럼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돼 있는데 명성황후는 안채 격인 곤녕합에 머물렀다. 그가 일제의 자객에게 목숨을 빼앗긴 곳도 곤녕합 남쪽 누각 옥호루였다. 1895년 10월8일 일어난 이 일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왕의 침전인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왕비를 잃은 왕은 이듬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된다. 건천궁은 고종 개인에게 의미 있는 곳이면서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슬픈 기억이 도사린 곳이 되고 말았다.
건천궁에서도 최초로 전깃불이 들어온 곳은 장안당의 북쪽 누각인 북행각이다.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Edison Electric Light Company)가 발전기를 이용해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깃불을 밝혔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탄소 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의 일로 중국의 자금성이나 일제 궁궐보다 약 2년이나 앞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어떻게 전깃불의 존재를 알았을까. 비밀은 1883년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에 있다. 보빙사는 미국에서 농장 시설과 농기계 등을 견학한 후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을 시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증기기관 및 전기 시설에 대해 보고를 올렸고 어명을 받들어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했다.
경복궁 전등소는 동양 최고의 첨단시설
전등소는 지금으로 치면 화력발전소다. 당시 석탄을 때서 발생한 증기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에디슨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전등과 발전설비를 발주하자 매우 신기해하며 즉시 전등소 구축에 들어갔다. 에디슨은 특별히 공들여 일류로 지었다고 한다.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도 전등소를 수출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주재 조선명예총영사였던 에버렛 프레이자의 전문(電文)과 에디슨사의 총지배인 프랜시스 업턴이 에디슨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해 모델 플랜트로 시공되었다. 앞으로 일본 궁성에 설치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일류시설(only first class plants in the East)이다”고 되어 있다.
전깃불은 장안당 북행각에 이어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그리고 대청에도 설치되었다. 실내 전깃불 외에도 건청궁 앞뜰 그리고 담 밖에 가로등이 들어섰으며 연못 안의 향원정에도 전깃불이 들어왔다. 전등이 켜지던 날 이를 구경하기 위해 궐내 사람들이 전부 향원정 앞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전깃불을 밝힌 것을 시작으로 고종은 1894년에는 건청궁전등소의 세 배에 달하는 제2전등소를 창덕궁에 지었다. 1896년에는 덕수궁을 중심으로 중앙부서·개항장 인천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가설해 공무에 이용했다.
1898년에 이르러서는 황실 자본을 토대로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설립하고 수도를 가로지르는 전차와 거리를 밝히는 전등을 설치하는 등 고종은 우리나라 전기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주인공이다.
이렇듯 최초의 전등으로 시작된 변화는 조선의 풍경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당시 사람들은 전깃불을 신기한 불이라는 뜻에서 ‘도깨비불’ 또는 ‘묘화(炒火)’라 불렀다.
경복궁 복원발굴로 밝혀진 최초의 발전소
오랫동안 최초 전등소의 위치는 건청궁과 향원지 사이 어딘가로 알려졌다. 이는 경복궁에서 오래 일했던 안상궁이 1936년 경성전기 등화사료실 소속 일본인 연구가 기시겐에게 한 증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전등소의 유구를 발굴하면서 향원지와 영훈당 사이에 전등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향원지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위치가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영훈당은 고종 때 세운 흥복전(興福殿)의 부속 전각이다. 흥복전은 조정의 내각회의와 경연(經筵) 및 외국 공사 접견 등 왕의 편전으로 사용돼다가 1917년 헐렸다. 다른 이유는 없고 불탄 창덕궁을 복구할 목재가 필요해서라고 한다.
전각이 사라진 공간에 잠깐 왜식 정원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100년 넘게 공터로 남겨졌다가 현재는 발굴 조사를 끝내고 영훈당 복원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128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전등소를 통해 우리나라는 전기 발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던 그 시절 독자적으로 전기설비를 도입해 근대 과학 문명의 빛을 밝힌 사실은 아시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들어섰던 건청궁은 세파 속에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1907~1909년 사이 철거됐다. 지금의 건청궁은 2006년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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