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42] 두려움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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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12 06:30:12

희숙은 ‘단위사업장 활동지침서’를 숙지했고 위장 근로자 보안지침서는 통째로 암기했다. 예를 들면 공동생활 공간·모임·대화·문건 등의 일상생활 수칙이나 피신과 신고·조사 시 응대 사항 및 근로자 포섭 방법·근로자 관계 형성 방법 등은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올 정도로 외웠다. 특히 희숙이 긴장을 풀지 않은 대목은, 잡혔을 때 조사 과정에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

희숙이 살아오면서 수치심 느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가난한 집안의 입 하나 줄여 보자고 막내 여동생을 오촌 당숙 집 양녀로 보낸 것이며 아버지가 아픈 어머니 병원비 마련하러, 희숙의 대학 등록금 꾸러, 친척 집 전전하며 돈 구걸했던 것, 없는 집 딸년을 대학 보내려 한다는 주변의 비아냥을 감내하는 것. 모두 수치였고 가난에서 기인했다. 무시와 조롱·비웃음은 견뎌야 할 수치심이 아니라 인내심이었다는 걸 희숙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런 수치심의 종류와 차원이 다를 거라는 게, 막연한 두려움의 실체였다. 그보다,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면접 시 가운데 앉았던 남자는 회사 대표의 아들 권지호였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아버지 사업체를 이어받을 생각으로 졸업 후 입사해 공장 현장에 투입됐다. 그는 침착하고 꼼꼼했으며 예리했다. 그가 경영하는 방식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노동 환경이 열악하긴 해도 그건 일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작업량이 많아 야근을 밥 먹듯 했지만, 월급을 제때 안 준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다.

일월은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조가 늘어나는 것에 긴장한 상태였고 곧 일월에도 노조가 결성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일월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았는데 정규직 임금의 70%를 받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월급을 제때 준 것 빼고 저임금·초과근무·부당 해고 등은 일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지호는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눈에 띄지 않게,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게 사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직급은 30대 중반 전무였으나 회사의 실세였고 그는 강경할 때와 타협할 때를 적절히 이용해 직원들을 관리했다.

주변 사업장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으로 일월 내에서 술렁임이 포착되면 공공연히 직장 폐쇄하겠단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권지호는,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대머리나 반백 등 충신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권지호는, 대머리나 반백이 놓은 반협박·반강제에 근로자들이 위축되어 있으면 위로하고 토닥거리는 역할을 했다.

직장 폐쇄라니요, 직장을 닫으면 여기 있는 식구들은 어디로 갑니까. 다 내 식구인데.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식이었다. 직원 입장에서 권지호는 고통의 화신도 시련의 저승사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권지호는 직원들에 호의적이었다. 그의 등장 이후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암튼 권지호는 달라.’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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