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오늘생각]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를 읽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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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8-13 00:02:55

패배했을 때 적어도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만큼 실존적인 정직성을 실험·시험할 수 있는 경우는 따로 없다.

어느 작가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는 실존적이라는 말을 몇 번씩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그래도 실존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엔 감정의 교류가 필요했기 때문에 성급하게 그의 말에 공감해 주면서 속으로는 겉으로 표현한 것보다 더 깊이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이것은 뭔가 멋진 경험이다. 이런 패배의 실존적 효능을 맛본 것이 또 언제던가? 내 대학노트의 어느 페이지에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자의 아름다움”이라는 낙서가 있었다. 그때 이미 강남역에 늘어선 자본의 성채들은 내게 싸움이 승리로 끝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게 했다. 격세지감, 상전벽해…, 지금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패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1991년 8월19일 낮, 그때 나는 동대입구역 앞에 서서 호외가 뿌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큰 신문활자를 본 것은 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말고는 그때가 유일했다. 한마디로 당혹스러웠다. 마치 그렇게 낡아빠진, 새 조류에 그토록 노둔하게 저항하는, 그것도 군대로써, 그런 세력에 나 자신도 끼어 있는 것 같은 지독한 열패감이라니….

그러고 나서 세상은 정말 딴판으로 변했다. 새로운 시대였다. 나는 어떻게든 그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낡음에서 빠져나오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막막함 속에서 짙은 안개 늪 속을 한 발 한 발 지뢰밭을 가듯 두려움과 외로움을 벗 삼아 나아가고자 했다.

‘등단’이라는 말에 나는 늘 위화감을 느끼지만 등단 초년 시절에 나는 결코 쾌활하지도, 경쾌하지도 않았다. 행복 따위의 관념은 아예 내동댕이쳐 버린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싸워야 한다는 절박감만은 분명했다. 자본이나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인 승리 이후에도 도덕적으로 결코 선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 감각은 내 손끝에 남아 있다. 우리는 늘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내가 두 발 담그고 있던 사상 또한 사상누각(沙上樓閣)처럼 공허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은 전개되어서는 안 되는 ‘악’이었다. 그때 내게는 의거할 것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낡고 패배해 버린 사상의 ‘주박’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위태로운 판단에 의지해서 제3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제 나는 지금 세상에 만개한 독화(毒花)들을 본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 같아도 꽃잎을 들춰 보면 ‘시취(屍臭)’가 진동한다. 분을 발라도 그 형해(形骸)를 감출 수 없다.

지금 내게 찾아온 이 지독한 패배감은 사실은 내가 보다 영리했다면 진작에 깨쳤어야 할 것이었다. 새벽 한 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의 개인주의’를 읽는다.

처음부터 그는 패배자였다. 실존적인 자는 늘 패배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술회한다. 대학생 시절에 자신은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써클’의 일원이었노라고. 그는 명민해서 그랬을 것이다. 일찍 거기서 떠나 자신의 독특한 ‘개인주의’ 세계를 구축했다.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나쓰메 소세키의 그 ‘국가주의’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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