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중국, 대만, 홍콩… 부상하는 거대 경제권” 타이틀의 과목을 수강했다. 기말고사 때 푸른 겉 표지의 노트(blue book)에 답안을 3시간 내내 힘들게 작성한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원에서 블루북 시험은 이례적이다. 대부분 20~30쪽 분량의 레포트를 요구했다.
그런데 인공지능(AI)가 등장한 지금 학생들의 레포트는 못믿겠다며 블루북이 재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블루북 판매량이 최근 2년 새 배로 늘었다고 한다. 블루북을 작성하는 동안 예전에는 가능했던 화장실 가기가 AI 도움을 받을까봐 금지됐다. 교수들은 AI로 쉽게 제작이 가능한 파워포인트 대신 구두 발표를 선호한다고 한다.
교실에서 아이패드 등 디지털 기기가 쫒겨나는 추세다. 미국 학부모들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또 부유한 계층일수록 교실내 디지털 기기 사용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여론조사 전문 퓨리서치 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히스패닉계 청소년의 58%, 흑인 청소년의 53%가 끊임없이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응답한 반면, 백인 청소년들의 경우 3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가 역전된 것이다.
노트북과 아이패드와 같은 디지털 기기가 교실에서 아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주요소가 되고 있다는 교육자 대상 설문조사(EdWeek Research Center, 2025.1~2월)가 있다. 미네소타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어떤 학생들에게 디지털 기기를 주는 것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주는 것과 같다“고 까지 응답했다. 적어도 강의실에서는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며 강의 내용을 정리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손으로 직접 노트를 작성케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주의도 산만하게 하지 않고 학생 본인도 소셜 미디어 체크 등 딴짓할 기회가 없게 되니까.
AI 시대 기업들은 인재 채용시 AI 활용 능력을 당연히 테스트한다. 동시에 기업들은 AI 의존에 따른 비판적 사고 결여, 독립적 문제 해결 능력 부족 등을 검증한다. AI 도움없이 자체 판단하에 창의적 솔루션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후진국에서는 디지털 갭을 메우기 위해 디지털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반면, 선진국에서는 AI 확산과 더불어 디지털 일변도 교육에서 탈피하기 시작하는 모양새다. 디지털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digital literacy) 만이 전부가 아니라 아날로그와 조화를 이룬 디지로그(digilog)가 첨단인 시대가 온 것이다. 한 켠으로 밀려나 있던 인쇄 책이 다시 각광받게 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돼 2000년대 초반까지 형성된 경기도 파주시 출판 문화 산업 단지가 전자책 등에 밀려 명맥을 유지하느라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 그러나 AI 붐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출판 단지가 다시 빛 볼 날이 왔다.
지난달 독일 개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er Buchmesse)에서 영미권 문학 에이전트가 국내 저작권 담당자에게 “불닭볶음면 같은 한국 소설은 없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AI가 몰고 온 종이책 붐에 K 도서가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겠다. 어린애들에게 태블릿을 주기보다 백과사전을 펼쳐 보며 놀게 하면 좋겠다. MS의 빌 게이츠도 어렸을 때 재미로 백과사전을 읽었다지 않은가. 브리태니카, 동아백과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을 다시 펴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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