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모든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여흥민씨의 종파는 크게 시정의공 민공규를 파시조로 하는 정의공파계와 상서공 민식을 파시조로 하는 상서공파계로 나눌 수 있다. 상서공 민식의 증손자 민지는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에 관향을 여흥(驪興)으로 삼았다. 여흥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의 옛 지명이다. 지난 2000년 기준 여흥민씨의 인구는 4만3887가구, 14만2572명, 전국 56위다. 여흥민씨는 지난 2002년 ‘족보문화연구원’에서 선정한 ‘한국의 8대 명벌’ 중 하나에 꼽히기도 했다. 명벌은 고려와 조선조까지 양조에 걸쳐 장기간에 지속적으로 최고 관직인 상신(相臣)과 문형(文衡)을 많이 배출한 가문을 의미한다. 여흥민씨의 시조는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다. 여흥민씨의 시조는 공자의 10대 제자 중 한명인 민자건의 후손 민칭도다. 민칭도는 고려 중엽에 중국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해 정6품에 해당하는 ‘상의봉어’에 올랐다. 이후 여흥민씨는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문가로 번성했다. 스카이데일리가 한국의 대표 명벌 여흥민씨 대종회와 대종회 소유 부동산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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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흥민씨대종회는 지난 2004년 12월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빌딩(사진)을 구입했다. 부동산 전문가에 따르면 이 빌딩의 가치는 10억원 가량이라고 한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집안 중 하나로 조선시대 4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스카이데일리
여흥민씨 후손들의 모임인 여흥민씨 대종회는 서울지하철 3호선 약수역 근처에 있다.
서울지하철 3호선 약수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에는 여흥민씨 대종회가 소유한 여흥회관빌딩이 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이 건물은 대지면적 231㎡(약 70평), 연면적 708.46㎡(약 214평),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다.
지난 1992년 9월 완공됐으며, 여흥민씨 대종회가 지난 2004년 12월 구입했다. 이 건물의 3층과 4층에는 임대 사무실이 있다. 5층에는 일반 가정집이 위치해 있다. 2층에는 설송장학회가 입주해 있으며 1층에 여흥민씨 대종회 사무실이 들어와 있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이 건물의 3층에 5평 넓이의 사무실이 임대로 나와있다. 임대로는 권리금 없이 보증금 120만원에 월세 40만원이다
정성진 어반에셋매니지먼트 대표는 “이 빌딩은 서울지하철 3호선 약수역 3번 출구 이면의 준주거지역에 위치해 있다”며 “시세는 10억원 전후다”고 말했다.
정치 격변기의 왕비들…조선 건국 도운 원경왕후, 당파 싸움 휘말린 인현왕후
▲ 명성황후 민씨. 사진은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기념관 내 명성황후 초상화 ⓒ스카이데일리
그러나 이들 왕비들은 요절하거나 시해를 당하는 등 비극적인 생을 살았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왕비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자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대왕·성녕대군의 어머니이기도 원경왕후 민씨다.
원경왕후는 부친 민제의 제자였던 2살 연하의 이방원과 혼례를 치뤘다. 1382년 당시 원경황후의 나이 18세였다. 성격이 괄괄하고 담대한 원경황후는 이방원과 결혼 후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당시에 큰 공을 세웠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원경왕후로 책봉됐다.
그러나 남편이 승승장구할수록 원경왕후의 세력은 위태로워졌다. 외척 세력을 경계한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종은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사약을 내렸다. 또 다른 형제인 민무휼, 민무회 역시 유배지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태종은 원경왕후마저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원경왕후는 왕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간신히 폐서인이 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원경왕후 본인은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왕비에서 물러나 왕대비가 됐다. 이후 2년 후인 1420년에 창경궁에서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년 후에 남편 태종이 죽자 현재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헌릉에 나란히 묻혔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이 시기를 긴박하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원경왕후 이후 300년간 왕비를 배출하지 못했던 여흥민씨는 조선 후기, 인현왕후를 배출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한 이후 서인들에 의해 추대돼 1681년 숙종의 두 번째 중전이 된다. 당파적으로 서인과 대립관계에 있던 남인은 희빈 장씨와 손을 잡는다.
인현왕후는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의 총애를 잃은 반면 희빈 장씨는 후일 경종이 되는 이윤을 낳아 숙종의 총애를 받는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의 일파인 노론 인사들이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대립해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결국 숙종은 이들을 면직·사사시키고 남인들을 등용했다. .
이 과정에서 서인과 정치적 동맹 관계에 있던 인현왕후는 폐서인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에 올랐다. 그러나 서인 소론파가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일으켰고, 숙종은 남인들을 유배·사사시켰다. 갑술옥사 이후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다시 복위됐다.
그러나 복위된 인현왕후는 몇 년 지나지 않은 170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인현왕후가 묻힌 명릉(明陵)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내부에 있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암투는 여러차례 영화와 소설 그리고 드라마 등으로 재탄생했다. 고전 소설로는 한 궁녀가 쓴 ‘인현왕후전’과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가 있다. 1961년 영화 ‘장희빈’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장희빈을 주제로 한 영화와 TV 연속극은 8편이나 제작됐다.
▲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왕조 유일의 황릉인 홍릉과 유릉이 있다. 홍릉에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합장돼 있다. 유릉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가 함께 합장돼있다. 홍릉과 유릉을 합쳐서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 홍릉의 전경 ⓒ스카이데일리
비운의 마지막 대한제국 황후, 명성황후·순명효황후
명성황후는 여흥민씨가 배출한 세 번째 조선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후다. 1851년 태어난 명성황후는 16세 때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에 의해 왕비로 간택됐다.
흥선대원군이 하야하자 고종과 함께 개화정책을 폈다. 국내외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해 경복궁을 침략했다.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국권 회복을 추구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눈 밖에 난 명성황후는 자객들에 의해 살해된다.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명성황후에게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부여되고 황후로 추존됐다. 그해 11월 명성황후를 청량리의 홍릉에 장례를 치렀다가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경기도 남양주 금곡 홍릉에 합장됐다.
여흥민씨가 배출한 마지막 왕비는 순명효황후 민씨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대한제국 두 번째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순종의 첫 번째 왕비다. 지난 1882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됐고 1897년에는 황태자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순명효황후는 비로 있으면서 친정도 잃고,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목격 하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에 경운궁(현재 덕수궁)에서 33살에 생을 마감했다.
순명효황후는 1907년 순종의 즉위에 따라 황후로 추봉돼 순명황후로 올려졌고, 능호도 유릉(裕陵)으로 바꿨다. 이후 순종이 붕어한 1926년에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돼 합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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