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욱 박사
고 박사는 한 달에 20여일 이상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는 인기 강사다. 이 날도 광명서초등학교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오늘 맡은 강연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성인들보다 강의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른들이야 눈치껏 집중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재미없는 강의는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눈높이에 맞추는 게 노하우죠”
1살에 소아마비 판정 받다
“의학이 많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인류의 의학은 아직 미미한 수준입니다. 감기나 무좀조차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상황이죠. 거의 멸종단계에 이른 질병은 현재까지 천연두와 소아마비 2개 정도인데 운이 없게도 두 질병 중 하나인 소아마비에 걸렸어요”
고정욱 박사는 1960년에 출생해 이듬해 소아마비에 감염되면서 장애를 갖게 됐다.
“소아마비는 감기처럼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등뼈 안에 있는 척수를 공격합니다. 척수는 모든 신경의 통로인데 바이러스는 감각신경은 그대로 놔둔 채 운동신경만을 마비시키죠. 때문에 감각은 있지만 움직이지를 못해요”
고 박사의 어머니께서는 병원에서 소아마비 판정을 받은 후 고 박사와 함께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굳게 마음을 먹고 고 박사를 키우셨다고 한다.
학창시절 “차별을 차별인 줄 몰랐다”
▲ 초등학생 시절 가족 사진(우측 두번째)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혼자 걸을 수 없었던 고 박사는 어머니께서 매일 등·하교를 시켜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학교에는 소아마비 장애인 학생이 여러 명 있었지만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으며 다른 학생들에게 놀림 받기 일쑤였다고.
“지금에서야 알 수 있지만 어릴 적에는 차별이 차별인지 모르고 컸습니다. 장애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많았죠. 수학여행이나 소풍 때에도 선생님들은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쉬어라’하고 말하며 장애를 장애 학생들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뀐 현재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이 존재해 법적으로 걸리지만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초등학교 때와 달리 혼자 등·하교를 하게 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힘이 들었다.
“학교에서 배려해주는 것은 3층 교실에 배정받게 되면 2층 교실로 옮겨주는 정도였습니다. 체육수업은 열외가 돼 교실을 지키는 당번이었죠. 당연히 체육점수는 나올 수가 없어서 잘해야 ‘미’나 ‘양’을 받았고 평균점수가 깎일 수밖에 없었어요. 장애가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교에 항의도 못하고 설움을 삭혀야 했습니다”
장애로 인해 ‘의사의 꿈 포기’
▲ 장애인 복지카드
“부모님께서도 직업에 대해 같이 고민하셨지만 금은방 경영이나 시계 수리, 도장 파는 일처럼 단순 노동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죠. 아버지께서 조금 고급스러운 직업을 생각하시던 중 의사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장애인 중 의사가 된 사람이 없었지만 정보의 부재로 인해 실상을 몰랐어요”
고 박사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의사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실상 대학에서 장애인에게 응시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고 공과대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험과 실습에 있어서 신체적 부자유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과와 관련된 학과 중 수학과만이 유일하게 응시가 가능했습니다. 부랴부랴 문과로 바꿨지만 그동안 꿈꿔왔던 의사의 꿈이 막혀 자포자기 상태였어요. 아버지께서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에 응시원서를 넣은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될 정도였습니다”
“경험은 언젠가 자산이 된다”
생각지도 않던 국문과에 진학한 것은 고 박사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부자유스러웠던 탓에 소설책이든 만화책이든 눈에 보이는 책들은 모조리 읽었던 경험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문과에 들어와 수업을 들어갔더니 옛날 읽었던 책들을 그대로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국문과를 꿈꾸고 들어온 학생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상태였죠. 특히 성대신문에 만화나 꽁트, 원고를 쓰면서 작문에 대한 재미를 느꼈습니다. 국문과를 간 것은 운명이라고 느꼈죠”
고 박사는 1학년 때부터 성대신문 현상공모에 계속 작품을 썼고 4학년 때는 당선되기까지 했다. 성대국문과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거쳐 문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교수로 가는 길마저 막혀
▲ 학위 수여식
“예전에는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 때 교양국어 등 대학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 배정을 해 줬습니다. 하지만 조교가 와서 나에게만 강의가 배정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어요. 왜냐고 물으니 장애가 있기 때문에 칠판에 글도 쓰지 못하는 등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죠. 또 다시 상처를 입었습니다. 당사자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에 고 박사는 학과에 ‘일단 해보겠다’, ‘못하면 그 때 강의 자리를 내놓겠다’며 항의했고 결국 다음 학기에 강의 기회를 받게 됐다. 고 박사는 국문과에서 국어작문을 가르치게 됐고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면서 교수의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박사 학위 취득 후 각 대학에 교수 모집에 응모를 한 고 박사는 모든 대학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29세에 이미 책을 쓰기 시작해 박사 과정을 마칠 때쯤에는 문화일보 창간 기념 문예공고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한 고 박사는 국문학에 대한 지식도 탁월했기 때문에 원서를 내면 서류심사에서는 무조건 1순위였다.
그러나 총장이나 이사장이 참석한 최종 면접 자리에만 가면 거부를 당했다고 토로한다.
“저와 같은 우수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그 분들은 ‘우리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없다’, ‘장애인 시설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저를 배척했습니다. 실력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도 아니고 시설을 빨리 구축하겠다는 말도 아니었죠. 귀책사유가 대학에 있음에도 중고등학교 시절처럼 저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포기란 없다”…187권 책 출간
▲ 가방 들어주는 아이(해외판)
고 박사의 노력을 사람들이 인정한 것일까. 94년 출판한 ‘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슈가 됐다. 작가의 길에 확신이 선 고 박사는 소설에 멈추지 않고 동화책으로도 발을 넓힌다.
“동화를 처음 쓴 계기가 된 것은 세 명의 자녀가 읽는 동화책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내용이 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한 번 써보자’는 심정이었죠. 왕자와 거지, 요정, 선녀님에 관련된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어요. 나만이 쓸 수 있는 동화를 창작하고 싶었습니다. 장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는 그런 동화를 말이죠”
이런 생각으로 쓴 첫 동화가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었다. 뇌성마비인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인 이 동화는 출판되자마자 교보문고 창작동화 부문에서 6개월간 1위를 했고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동화책이 됐다.
이어 출판된 ‘안내견 탄실이’ 또한 베스트셀러가 됐고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2004년 MBC 느낌표 프로그램 중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돼 1주일에 20만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92년 작가로서 내년이면 등단 20주년이 됩니다. 현재까지 제가 쓴 책은 총 187권이죠”
장애인들이 차별로 고통 받지 않는 사회
고 박사는 출판 활동과 함께 전국적으로 강의도 수없이 다닌다. 장애인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고 박사는 강조한다.
▲ 광명서초등학교 강연
“사실 강연료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강연에 열심인 이유는 제가 겪었던 상처들을 후배 장애인들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 비장애인들의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면 언젠가는 사회 전체가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늘이 저에게 소아마비라는 고난을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아갈 방향을 알기 때문에 방황이나 시간 낭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일종의 소명의식이라고 할까요. 비장애인도 한 순간에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같이 해결해야할 문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고 박사는 현재까지 2억5천만원 정도를 기부하고 있다. 특히 출판된 책 인세의 일부는 계속적으로 기부되는 상황.
“죽기 전에 목표 내지는 소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재산을 다 사회에 환원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실천하는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죠. 다음에는 죽기 전에 500권의 책을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고 박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동초’의 의미를 덧붙였다. 단순히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인동초가 아니라 그런 어려움을 다음 사람이 겪지 않도록 하는 ‘인동초’가 되고 싶다고.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