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폭력에 죄를 묻다 ‘79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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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폭력에 죄를 묻다 ‘79억:1’

원작은 제1회 울진웹툰영화제 수상작
장철수 감독이 메가폰 잡아 제작
79억 인구 대 1인의 대결 그려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10-29 09:36:00

▲ 창공에 나타난 우주 함선을 보고 놀라고 있는 김해진 부부. ‘79억:1’ 스틸컷

어느 평범한 아침,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되더니 창공으로 커다란 우주 함선이 나타난다. 하늘 전체를 가릴 만큼 거대한 우주선이다. 그리고 도심 전광판이며 TV 할 것 없이 온갖 미디어에 한 가지 메시지가 뜬다.

서울 양천구 산호아파트 105동 505호에 사는 김해진이라는 인간을 1시간 안에 내놓으라는 것. 그러지 않으면 전 지구인을 몰살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거대한 우주 함선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해진과 그의 아내는 매우 큰 혼란에 빠지는데 잠시 후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이 우르르 그가 사는 아파트로 몰려든다.

1시간 안에 제물을 바쳐라!

‘79억:1’은 제1회 울진웹툰영화제 특별상 수상작인 동명의 웹툰을 영화화한 것이다. 조아진 작가의 작품으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장철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79억:1’이란 전 지구인 대 1인의 싸움이라는 뜻이다. 그의 집 앞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김해진 부부는 집 안에 갇히게 된다. 그때부터 전 지구인과 김해진과의 대결이 시작된다.

지구에 주어진 시간은 단 1시간. 그 안에 김해진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김해진일까?

영화 속에서는 누구도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겨를이 없다고 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다음 날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그 시간이 1시간 앞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까?

사람들은 1시간 안에 우주인이 지목한 그를 제물로 바쳐야 했으므로 마음이 바쁘다. 그의 집 현관문을 부술 듯 두드린다. 빨리 나오라고 소리친다. 79억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자연재해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쳐왔다. 풍랑을 만난 배는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사람을 바다에 던졌다. 자연재해가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물의 대상은 주로 처녀였다. 제물은 누구보다 정결해야 했다. 한국 고전소설 속 심청이도 인당수에 제물로 던져진 적이 있다.

집단 내 거대폭력에 바쳐진 제물

구약성경에서는 정결한 어린 양을 정기적인 번제의 제물로 삼았다. 번제란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은 어린양을 죽여 피를 흘린 후 양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모든 죄를 고백해 씌웠다. 그런 뒤 태웠다. 여기서 속죄양이라는 말이 나왔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이 희생양 제의가 집단의 결속을 가져온다고 통찰했다. 집단 내 갈등을 한 사람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그 집단은 결속을 다지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생양은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 아니라 집단 내부의 거대폭력에 봉헌된 제물인 것이다.

정결하다는 것은 약자를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나이 어린 처녀가 무슨 힘이 있어 성인 남자에게 대항하랴, 어린양이 무슨 힘이 있어 사람에게 반항하겠는가. 말하자면 희생양 제의는 인류의 비겁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공식적인 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김해진이 마침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의 아내가 팔을 붙잡는다. 남편을 말리는 대신 자기도 같이 따라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때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은 ‘같이 있어 줄게’였다. 79억 명이 한 사람에게 집단폭력을 행사할 때 그래도 그에게는 같은 편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해진은 죽지 않는다. 그의 목숨을 요구했던 이는 우주인이 아닌 신이었다. 신은 김해진과 그의 아내를 살려 주고 79억 명의 목숨을 받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되어야 했다. 심청을 죽이려 한 어부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 심청이가 복을 받아 잘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죄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물며 그들은 살인자가 아닌가.

아무리 풍랑이 배를 위협한다고 해도 지구 멸망이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다.

한편 울진웹툰영화제는 웹툰 작품을 공모해 우수작품을 시상하고 원작을 영화나 영상물로 상영하는 행사다. 경상북도와 울진군, ㈜한국수력원자력이 후원한다.

임유이 기자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