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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36] 슬프니? 지금도 슬프니?
나의 지옥이 그녀에게 쓸모가 있다면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3 06:30:10
 
 
누가 죽었어?’
 
아이가 공책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두 개의 글자를 썼다.
 
. .’
 
글자를 한참 보던 마리아는 내가 쥐고 있던 연필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탕을 문 채로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프니?”
 
물고 있던 사탕을 입에서 꺼내 손에 들고 아이가 조그맣게 물었다. 아이가 말할 때 달콤한 향기가 솜사탕처럼 내 볼에 닿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연필만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이의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익숙하고 깊은 공감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가 공책 위에 사탕을 내려놓았다. 마리아가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팔을 벌려 아이가 나를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나, 화들짝 놀랐지만 아이는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귀에 대고 물었다.
 
지금도 슬프니?”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목구멍이 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책의 제목들이 뿌옇게 흐려졌다. ‘보물섬은하철도의 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오즈의 마법사’.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였다. 아이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티셔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슬프면 엄마가 날 꼭 안고 가슴을 만지게 해 줬어. 그럼 안 슬펐어.”
 
아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아이의 가슴을 만졌다. 아직은 밋밋한, 그러나 이제 곧 부풀기 시작할 가슴이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온전히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그 슬픔을 잠시 잊고 내 심장이 콩콩, 뛰고 있었다.
 
지금도 슬프니?”
 
아이가 다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눈을 감고 소녀의 가슴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아이의 심박수를 세며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아이도 나를 기다려 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내 심장도 뛰었다. 마침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꼭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아이가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를 내 코앞에 들이대고 생긋, 아이가 해처럼 웃었다.
 
하겠어요!”
 
정하운을 마주보며 내가 말했다. 당신을 믿어 보겠다는 말은 혀 밑에 감췄다. 어쩌면 그녀의 행동과 말은 동의를 얻기 위해 계산된 것인지도 몰랐다. 재단이 아니라 다단계나 피라미드 회사인지도 몰랐고 보험 상품처럼 내가 그녀의 실적에 플러스가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 말고 기대하고 의지해야 할 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를 잡아 주는 어떤 손이라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건 정하운, 그녀뿐이었다. 이토록 참담한 나의 지옥이 그녀에게 쓸모가 있다면, 내 죽음이 이용될 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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