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릉 
광주 
제주 
목포 
)
품석은 성문을 열고 백제군을 맞아들였다. 성안으로 들어선 윤충은 군사들에게 명해 품석을 포박해서 성주부로 끌고 가게 했다.
부청에 자리한 백제군 수장은 앞마당에 무릎 꿇려진 품석을 심문했다.
“네가 성주로 부임한 이후로 여염집 아녀자를 겁탈하고 성민의 재산을 착취했다던데 그것이 사실이냐?”
품석은 하늘이 노래졌다.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더니 추상같이 죄를 추궁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장군께서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신라의 진골(眞骨)인 제가 어찌 그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윤충이 비웃으며 검일을 대령시켰다.
“저자는 너의 아내를 겁탈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검일은 독기를 잔뜩 품은 눈으로 성주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품석은 기가 질려 고개를 떨구었다.
검일은 비분강개하여 부르짖었다.
“성주 품석은 평소에 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일을 보러 멀리 나간 사이에 아내를 겁탈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권력이 막강한 자라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아내 말고도 수십 명의 여인을 욕보였습니다. 그 일로 자결한 아낙도 한둘이 아닙니다. 대야성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윤충이 품석에게 다시 물었다.
“이래도 발뺌하겠느냐?”
피해 당사자를 대질시키니 부인할 수가 없었는지 성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모척이 부들부들 떨면서 부르짖었다.
“저자 때문에 많은 백성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는 웃옷을 벗어 던졌다. 흉하게 패이고 찢긴 고문의 흔적이 상체를 휘감고 있었다.
누구 하나 성주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윤충은 노심초사했다. 항복한 적장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워낙 포악해서 성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기에 별수가 없었다. 윤충은 고민 끝에 품석을 참수형에 처했다.
성주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고타소랑은 대들보에 목을 맸다. 이때 검일이 군사들과 함께 들이닥쳐 그녀의 자결을 막았다. 고타소랑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적장 앞에 끌려갔다.
검일이 고타소랑을 윤충에게 바치며 말했다.
“이 계집은 품석의 처입니다. 제법 미색이니 장군께서 취하십시오.”
윤충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패장의 아내라지만 아녀자를 겁간하는 일은 백제의 장수로서 명예롭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다.”
윤충은 단호히 거부하고 고타소랑을 집으로 고이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큰소리로 통곡한 후 다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죽죽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서 백제군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 용석(龍石)이 한사코 말렸다.
“이미 백제군이 성안에 들어왔네. 저항해 봤자 애꿎은 목숨만 잃을 걸세. 항복해서 살아남은 뒤 후일을 도모하세나.”
죽죽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네. 아버지가 나에게 죽죽(竹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것은 엄동설한에도 푸른 대나무처럼 살라는 뜻이었네. 나는 꺾여도 굴하지 않을 걸세.”
죽죽이 결연하게 나아가 싸우니 용석도 감동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들은 곧 백제군에게 포위당했다. 두 사람은 굴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후일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 충정을 기려 죽죽에게는 급찬(級飡), 용석에게는 대나마(大奈麻)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처자를 도성으로 이주시켜 부족함이 없도록 돌봤다.
이렇게 해서 신라 서변의 최고 요충지인 대야성은 허무하게 백제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 일로 신라는 낙동강 유역까지 그 세력 범위가 줄어들었다.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얼마 후 의자왕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일로 성충과 상의하고 있는데 시종이 들어와 고구려에서 사신이 왔다고 전했다.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가 백제에 사신으로 온 것이었다.
의자왕은 일단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성충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무슨 일로 사자를 보냈을까? 요즘 고구려의 정세는 어떠하오?”
“고구려는 예로부터 자국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겨 왔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은 수나라의 대군을 거듭 물리치면서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수나라에 이어 서방을 재통일하고 주변국에 주종 관계를 요구했을 때 오직 고구려만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류왕이 즉위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당과 우호 관계를 맺고, 고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경관을 허무는 등 저자세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연개소문을 위시한 젊은 장수들이 거사를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 겁니다.”
“그러면 연개소문이 지금 고구려의 실세라는 얘기구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얘기해 보오.”
“연개소문의 집안은 동부대인의 직위를 세습하는 귀족 집안으로 대대로 뛰어난 무인을 배출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는 심지가 곧고 용맹하며 도의에 어긋나는 일에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라 하더이다.”
“권력을 잡았으니 조만간 왕위를 찬탈하려 하지 않겠소?”
“비록 왕을 시해했다고는 하나 왕위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더구나 고구려 사람들도 우리처럼 천손(天孫)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 연개소문이 왕위에 욕심이 있다고 해도 뜻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그가 거사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오?”
“고구려가 당과 맞설 수 있는 강건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뿐 아니라 고구려 백성 모두의 염원일 겁니다.”
의자왕은 생각에 잠겼다. 성충의 말대로라면 고구려는 다시 예전처럼 강맹해질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당분간 그들의 관심은 당(唐)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득세한 것이 백제로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의자왕이 다시 물었다.
“연정토를 보낸 이유는 뭐겠소?”
“고구려 처지에서 볼 때 당과 겨루기에 앞서 남변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을 겁니다. 분명 우리와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일 겁니다.”
성충과 상의를 끝낸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온 연정토를 편전으로 들게 했다.
어전으로 들어선 연정토는 백제 왕에게 예를 올렸다.
의자왕은 그를 향해 말했다.
“어서 오시오. 그래, 무슨 일로 짐을 찾아온 게요?”
연정토는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화친을 넘어 공수(攻守) 동맹을 맺으러 왔다고 말했다.
흥수가 불쑥 나섰다.
“우리는 국왕을 시해한 반란 세력과는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소. 헛수고 말고 돌아가시오.”
고구려 사신은 당당히 받아쳤다.
“나는 새로이 즉위한 고구려 국왕의 사신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소. 그리고 이번 거사는 백성이 원했기에 일어난 것이니 반란이 아니라 의거이며 혁명이오. 백제가 우리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소. 다만, 푸대접한 것은 절대 잊지 않겠소!”
연정토가 분연히 떨치고 나가려 하자 백제의 대신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성충이 황급히 의자왕에게 다가가 넌지시 아뢰었다.
“선대왕 시절에 고구려 왕제 건무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화친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신라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고구려 역시 수나라와 전쟁하는 동안 남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두 나라의 동맹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지요. 지금의 상황도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맹을 맺으면 서로에게 힘이 될 겁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으며 연정토에게 사과했다.
“하하하, 우리가 그대를 잠시 시험한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그럼 본격적으로 동맹에 관해 얘기해 봅시다.”
신하들도 하나같이 나서서 말리니 사신은 못 이기는 척 돌아섰다.
의자왕이 연정토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거요?”
“우리 고구려는 당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백제와 동맹을 맺어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백제는 지금처럼 신라를 압박하여 우리의 남쪽 변경을 넘보지 못하게 해 주시면 됩니다. 우리도 백제가 요청하면 언제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백제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제안이었다. 사실 의자왕도 신라를 공격할 때 고구려가 쳐내려 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의자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도 바라는 바요.”
연정토는 합의를 모색하는 가운데 일침도 잊지 않았다.
“백제가 신의를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양국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날 백제가 고구려를 저버리고 신라와 합세하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은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의자왕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약속했다.
“물론이외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짐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앞으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백제 왕의 수굿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신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논의가 끝난 후 의자왕은 고구려 사신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각처에서 올라온 음식 재료로 만든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졌다. 악공들이 거문고를 타고 무희가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의자왕은 모든 일이 잘 풀려 간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번에야말로 신라를 제대로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켠 후 연정토에게 친히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짐은 두 나라가 앞으로 사이좋게 번창해 나가길 바라오.”
연정토는 황송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가 장밋빛 앞날을 꿈꾸며 흥청거리는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