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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육중한 성문이 열리더니 수많은 당군이 쏟아져 나왔다. 걸회수는 달려드는 적군을 도끼로 쳐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서서히 밀리고 있을 때 뒤에서 장량이 이끄는 당군의 본대가 나타났다. 고구려군은 몰려드는 당군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죽어 갔다.
걸회수는 말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돈황은 끝까지 남아 당군에 맞섰지만 수적 열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후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이렇게 해서 천혜의 요새라 불리던 비사성은 어처구니없게 함락되었다.
요하 하류에서 미리 준비해 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장검은 진군을 서둘러 건안성에 당도했다.
건안성은 요하 하구에 있는 석성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봉우리를 이어 포곡식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총 둘레가 20리를 넘는 큰 성이었다. 서쪽은 자연 암벽으로 되어 있고, 북쪽은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 당시 건안성의 성주는 기동부(期東夫)였다. 그는 냉정하고 사려 깊은 지장(智將)이었다. 성에는 국내성에서 파견된 경당 출신 군사를 포함해 약 2만의 군사가 주둔해 있었다.
당나라 장군 장검은 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문 앞에 가서 싸움을 걸었다.
“순순히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기동부는 성 아래에서 목청껏 외치는 적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너 따위와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 이세민을 데리고 와라.”
기동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장검에게 활을 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장검의 투구에 명중했다. 장검은 혼비백산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깜짝 놀란 수하 장수들이 수장을 들쳐 업고 영채로 돌아갔다.
장검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가 저승이냐, 이승이냐?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느냐?”
부장 국자성(麴自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화살이 투구에 맞았을 뿐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장검은 안심하면서도 두려움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신중해야 할 것 같다. 건안성의 형세를 살핀 후에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장 흑달(黑達)이 눈치 없이 나섰다.
“최대한 빨리 건안성을 함락시키라는 폐하의 명이 있지 않았습니까.”
“싸움을 미루자는 게 아니다. 잠시 고구려군의 반응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 알고 모두 물러가라.”
장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수하 장수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도독의 군막을 빠져나왔다.
장수들은 부장 국자성의 막사에 다시 모였다.
“도독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소. 우리라도 대책을 세워야 하오.”
국자성의 제안에 흑달이 활기를 띠며 물었다.
“무슨 방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 도독이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걸 고구려군도 보았소. 그러니 이를 이용해 고구려군을 유인해 봅시다. 도독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조용히 회군하는 거요.”
국자성의 말에 장수들의 귀가 솔깃했다.
동료 장수들이 경청하자 국자성은 계책을 속삭인다.
“여기서 오십 리쯤 가면 계곡이 있소. 그곳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다가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그쪽으로 유인해서 모조리 섬멸하는 거요.”
흑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고구려 군사들이 과연 성 밖으로 나오겠습니까?”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저들이 나오지 않고 배길 수 있겠소?”
국자성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장수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밤 당군은 어둠을 틈타 부산하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군의 철수를 확인한 부장 마동(馬同)이 기뻐하며 기동부에게 달려갔다.
“장검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사실이었나 봅니다. 지금 당군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당장 쫓아가서 무찔러야 합니다.”
당군 진영을 내려다보던 기동부는 고개를 저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이는 필시 속임수이다. 내가 쏜 화살은 그의 투구 장식을 맞췄을 뿐이다. 저들이 저리 움직이는 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수작이다.”
부장은 기동부의 판단을 믿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냥 내버려 둬라.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제풀에 지쳐 군기가 해이해질 것이다. 그때를 노려 공격하면 완벽히 승리할 수 있다.”
성주의 지시로 건안성의 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퇴하던 당군이 계곡에 이르자 매복해 있던 국자성은 장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방심하지 마라. 곧 고구려군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구려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날이 샜다.
국자성이 아무런 성과 없이 본대에 합류하자 장검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절대 성공할 수밖에 없는 계책이라 큰소리를 쳐서 믿고 따랐지만 결과는 아니 하느니만 못했다.
도독은 부장을 힐책했다.
“너의 말대로라면 벌써 고구려군이 나타났어야 하지 않느냐. 이게 무슨 헛고생이냐!”
국자성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핑계를 댔다.
“아무래도 기동부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며칠 기다려 보다가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겠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장검은 크게 화가 났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느냐! 대당의 장수로서 부끄럽지 않으냐?”
부장은 무안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날이 밝자 당나라 군사들은 냇물을 길어 밥을 해 먹었다. 이날도 온종일 기다렸지만 고구려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장검은 수하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하루만 더 기다려 본 다음 그래도 고구려군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건안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날 밤에도 당군은 혹시 나타날지 모를 고구려군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장검은 군사를 이끌고 다시 건안성으로 돌아갔다.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며칠간 꼬박 경계를 섰기에 당나라 군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다.
건안성 앞에 다시 진을 치는 가운데 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냐?”
“그러게 말이야. 무슨 계책이 이리 우스운지.”
“그건 그렇고 저 건안성에 있는 고구려군은 도통 싸울 생각이 없나 보네.”
“예전부터 고구려군이 즐겨 쓰는 전법이잖아. 성을 지키며 시간을 끌다가 상대가 지쳐 물러가면 쫓아가서 뒷덜미를 물어뜯는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왜 안 쫓아왔대.”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데 속아서 뛰어들 만큼 바보가 아닌 게지.”
당군들은 무능력한 지휘관을 성토하면서 고구려군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더불어 피로가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니 기강이 해이질 수밖에 없었다.
성루에서 이 광경을 주시하던 기동부가 드디어 명을 내렸다.
“이제 됐구나. 저들의 군기가 해이해졌다. 즉시 성문을 열고 나가 당군을 들이쳐라. 하지만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마라.”
건안성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더니 용맹을 자랑하는 고구려 경기병이 쏟아져 나왔다.
당나라 군사들은 당황했다. 그동안 무수히 싸움을 걸었지만 무대응으로 일관했던 고구려군이었다. 심지어 퇴각하는데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던 그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니 당군으로서는 놀랄 만도 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이들은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기병은 이들을 이리 찌르고 저리 베면서 몰아붙였다. 병장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당나라 군사는 고구려군의 거센 공격에 무수히 목숨을 잃어야 했다.
간신히 도망친 장검이 군사를 수습해 보니 3만 명 중 살아남은 자가 1만이 채 되지 않았다. 도독은 눈앞이 캄캄했다.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했다는 것을 당 태종이 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장검이 생각해 보니 이번 패배의 책임은 엉터리 계책을 내어놓은 국자성에게 있었다. 쓸데없이 군사들을 지치게 하는 바람에 대오가 흐트러지고 기강이 무너져 내린 것이 패배의 주원인이었다.
분노가 치민 장검은 칼을 빼 들고 국자성에게 달려들었다.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말리는 통에 참기는 했지만 분이 가시지 않았다.
장검은 할 수 없이 요동도행군 대총관 이세적에게 죄를 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건안성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적은 분기탱천했다. 당장 패배의 책임을 물어 장검을 참수하고 싶었지만 태종의 재가를 받아야 했기에 분기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대총관은 장검이 보낸 전령에게 일렀다.
“너는 이 길로 도독에게 돌아가 전하라. 요하를 건너가서 기다리다가 폐하께서 당도하시면 죄를 청하라고 말이다.”
군령을 받은 장검은 바로 요하 서안으로 허겁지겁 물러났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기세를 올리며 요동성으로 진군했다. 이를 전해 들은 요동성주 임석황은 수하 장수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개모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오. 아마 수일 내로 당군이 이곳에 당도할 것이오. 수성할 것인지, 나아가 싸울 것인지 결정해야 하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부장 송악이 먼저 나섰다.
“이곳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자들은 당군의 선봉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선봉대를 격파해 예봉을 꺾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렸다.
“건안성 전투에서 패한 영주부의 잔당은 어디로 갔소?”
“첩보에 의하면 요하 서편으로 퇴각했다고 합니다.”
“장검이 기동부에게 혼쭐이 난 모양이로군.”
도망치는 장검의 모습을 떠올리니 임석황은 웃음이 절로 났다.
잠시 후 성주는 장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송악 장군에게 1만의 군사를 주겠다. 장군은 요동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앞산 고개에 매복하라. 당군이 고개를 반쯤 넘으면 숲속에서 나와 고개를 점령하고 대열의 허리를 잘라라.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일대는 고개를 오르지 못하게 바위와 통나무를 굴리는 한편 또 일대는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당군을 쫓아가 베어라. 나는 고개 아래편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도망쳐 내려오는 당군을 모조리 죽이겠다.”
부장은 성주의 지시대로 군사를 이끌고 앞산으로 나아가 고개 주변에 매복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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