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릉 
광주 
제주 
목포 
)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은 의기양양하게 요동성 앞산에 도착해서 고개를 올랐다. 행군 총관 장군예(張君乂)가 선봉을 섰다. 고갯마루에 올라 바라보니 요동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은 돌을 쌓아 만든 석성으로 매우 견고해 보였다.
장군예의 부대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산기슭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의 부대가 고개를 넘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들리더니 숲속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뛰어나와 당군을 들이쳤다. 순식간에 고개를 점령한 송악은 뒤이어 올라오는 당군을 막았다. 그리고 일부 군사들은 이미 고개를 넘어 내려가고 있는 당군의 후위를 공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장군예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외쳤다.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라!”
이미 대세가 판가름 난 상태였기에 그의 외침은 별 소용이 없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혼이 빠져 고개 아래로 구르듯 내뺐다. 이들에게 떠밀려 산 밑까지 내려간 장군예는 정신을 차리고 대오를 수습했다. 하지만 이때 양쪽 숲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한참 후에 화살비가 그치더니 요동성주 임석황이 군사를 이끌고 숲에서 나왔다. 이제 당군은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싸울 의욕을 잃은 당나라 군사는 제 한 목숨 살자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래 봐야 고구려 군사의 창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 속에서 살아남은 자는 불과 수백을 넘지 못했다. 고구려군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고구려군이 고개에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적은 대책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개모성을 함락시켰다고 고구려군을 너무 얕잡아 본 게 실수였다. 이세적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고개를 오르던 아사나미사의 부대도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세적은 전령을 보내 군사를 물리게 했다.
대총관은 장수들을 돌아보며 한탄했다.
“장군예가 고구려군을 깔보고 덤벙대더니 결국 일을 그르쳤소. 척후병조차 내보내지 않은 모양이니 화를 자초한 격이구려. 일단 장군예를 잡아 함거에 가두었소. 폐하께서 오시면 그때 처리하기로 하겠소. 그나저나 고구려군이 고갯마루에 진을 치고 있으니 큰일이오.”
격전을 펼치다 온 아사나미사가 격앙된 얼굴로 말했다.
“시석(矢石)을 무릅쓰고라도 밀고 올라가서 고개를 탈환해야 합니다.”
이세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조건 돌격하면 아군의 피해가 크지 않겠소?”
계필하력 역시 강공을 주장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폐하를 맞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진격해야 합니다.”
아사나미사가 다시 나섰다.
“고구려군은 고작해야 1만 정도입니다. 밀어붙이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이세적은 마침내 공격을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아사나미사는 돌궐족 2천을 포함한 2만의 돌격대를 이끌고 고개를 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철제 방패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세적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2만의 돌격대가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산을 오르니 자못 군세가 대단했다. 산의 정상에서 이를 바라보던 고구려 장군 송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당군이 철제 방패를 들고 산을 오르니 쇠뇌를 쏴도 소용이 없겠구나. 게다가 비까지 이리 내리니 불화살도 쓸 수 없겠어.”
송악은 마음을 추스르고 부하 장수들에게 일렀다.
“적의 기세가 만만치 않구나.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다.”
곧이어 치열한 공방전이 개시됐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백병전 끝에 당군이 고갯마루를 점령했다. 이날 죽은 당군만 5000명이 넘었고, 고구려군도 상당수의 군사를 잃었다.
송악은 살아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성으로 돌아왔다.
숱한 희생을 무릅쓰고 요동성 앞에 다다른 이세적은 높고 견고한 요동성을 바라보고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심중을 헤아린 계필하력이 눈치를 살피며 진언했다.
“지금까지 많은 군사를 잃었습니다. 게다가 장검이 이끄는 군대가 건안성에서 대패하는 바람에서 군사들의 사기도 많이 꺾여 있습니다. 일단은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폐하께서 당도하시길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현재의 병력으로는 난공불락의 요동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이세적은 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산기슭에 영채를 세우고 당 태종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요동의 상황은 속속 평양으로 보고됐다. 개모성에 이어 비사성까지 함락되었다는 보고에 연개소문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가 군사 도수금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고 있는데 궁에서 전갈이 왔다. 즉시 입궐하라는 보장왕의 명이었다.
연개소문은 의관을 정제하고 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배알했다.
보장왕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도둑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전선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대막리지는 황망히 대답했다.
“당군은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세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성을 쳤지만 성민들이 굳은 의지로 막아 냈습니다. 그래서 적들은 신성을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어 개모성을 공격했습니다. 개모성의 군민들 역시 한마음으로 싸웠지만 성이 함락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군은 내친김에 요동성 공략에 나섰지만 성주 임석황이 계책을 써서 크게 이겼습니다.
현재 당나라의 요동도행군은 요동성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데, 이세민의 본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밖에 당장 장검의 별동대는 건안성 전투에서 아군에게 대패한 후에 요하 서편으로 퇴각해 있습니다. 애석한 것은 장량이 이끄는 당군이 천혜의 요새인 비사성을 점령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참 듣고 있던 보장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대가 처음에 말하길 신성·요동성·안시성·건안성·비사성, 이렇게 다섯 성을 지킬 수 있느냐에 이번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했소. 그런데 비사성을 잃고 요동성이 위험에 빠졌다면 큰일이 아니오?”
연개소문은 면목이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장왕이 다시 물었다.
“비사성이 함락되었다면 서해안의 방어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오?”
그러자 연개소문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산 군도에 주둔하고 있는 온사문 장군이 이끄는 우리 해군이 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당군이 서해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면 언제라도 격퇴할 수 있습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장담을 듣고 적이 안심했다.
국왕의 안색이 밝아지자 연개소문이 조심스럽게 주청했다.
“우선 국내성과 신성에서 군사 4만을 뽑아 요동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소신이 직접 오골성으로 가서 작전을 지휘하겠습니다.”
“당주가 친정을 한다는데 그 정도 군사로 되겠소?”
“일단 급한 불을 끄고 차차 상황을 보아 대응 수위를 조절하겠습니다.”
궁에서 물러 나온 대막리지는 군사 도수금과 함께 오골성으로 떠났다.
해군의 본영을 서압록에서 석성도로 옮긴 온사문은 비사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는 즉시 인근 섬에 흩어져 있는 함선들을 총집합시켰다. 이 당시 고구려 해군은 500여 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온사문은 장수들을 소집했다.
“당나라의 평양도행군이 비사성을 점령했다고 하오. 당군이 승세를 타고 평양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 할 것이오. 그들이 출항한다면 석성도 인근 바다를 지나게 될 테니 광록도·대장산도·해양도에 주둔한 장수들은 각기 맡은 지역의 방위에 힘쓰시오. 나는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당의 함대가 나타나면 일전을 벌이겠소.”
5광록도를 책임진 나이 많은 장수가 물었다.
“적들이 언제쯤 나타날까요?”
온사문의 부관 석조(石組)가 대신 대답했다.
“5월 보름쯤이면 석성도 앞바다를 지날 겁니다.”
온사문은 손금 보듯이 적의 병력을 예상했다.
“장량이 거느린 당나라 해군의 규모는 병선이 300척 정도요. 배 한 척당 150명 정도 태울 수 있으니, 총 수효는 약 4~5만 명 정도일 거요. 그런데 비사성에도 병력을 남겨 두어야 하니 그보다는 적을 거라 생각되오.”
온사문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석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관은 장군들께 우리가 세운 작전을 보고하라.”
석조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50여 리쯤 떨어진 곳에 돌섬과 암초대가 있습니다. 해상으로 나가서 당선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겁니다. 그들이 암초 지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면 둥글게 에워싸고 화공을 퍼붓는 겁니다.”
한 장군이 부관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곳까지 적을 유인할 수 있겠소?”
“먼저 소형 전함 50여 척을 저들이 지나는 길목에 배치합니다. 적들은 우리의 전력을 얕잡아 보고 달려들 겁니다. 그러면 우리 전함은 학의 날개 꼴로 대형을 벌리면서 암초대로 후퇴합니다. 당선이 따라붙다가 암초 지대에 진입하면 돌섬 뒤에 숨어 있던 우리 주력함이 나아가 당선을 포위하고 불화살을 쏘아 격침시키면 됩니다.”
온사문이 준비해 둔 질문을 던졌다.
“적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따라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우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배후를 들이치면 됩니다.”
“그리하면 승산이 있겠나?”
부관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우리 배는 돛이 높고 클 뿐 아니라 불화살을 멀리 날릴 수 있는 대형 쇠뇌도 장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속력이 빠른 공격형 전투함입니다. 그에 비해 당나라 배는 인마나 양곡 수송용입니다. 애초에 우리의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장수는 석조의 설명에 만족했다.
뒤이어 온사문이 장수들에게 일일이 지령을 내렸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1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