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515억 기부 정문술 회장 ‘선한 영향력’ 이어지길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사설

벤처 정신과 기부 철학 보여 주고 떠난 정문술
“富 대물림하지 않겠다” 2남3녀 모두 다른 길
재산 사회 환원으로 ‘노블레스오블리주’ 실천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18 00:02:01

우리나라 1세대 벤처사업가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최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 전 회장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통 큰 기부’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정 회장은 ‘기술이 한국을 먹여 살릴 것’이란 신념으로 515억 원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 기부했다.

사실 정 전 회장의 ‘기부 결심’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부(富)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2001년에 300억 원, 그리고 2014년 215억 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정 전 회장에게는 2남3녀가 있었지만 자녀 중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을 기부하면서 마음의 갈등은 없었을까. 그는 “하루에도 12번씩 마음이 변했다”고 밝히면서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낸 데 대해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선언했다.

정 전 회장은 한때 중앙정보부 기조실 기획조정과장까지 지냈고 퇴직 후에는 여러 사업을 추진했으나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983년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했는데, 때마침 국산 반도체 수출 호조라는 행운이 따라 줬다. 이후 고속 성장한 미래산업은 1999년 11월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미국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정 전 회장은 2014년 카이스트에 기부금을 전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 기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가 카이스트에 당부한 건 딱 3가지였다. “이 돈으로 모방하지 말라. 비범한 인재를 모아 달라. 미래에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 달라.” 그러고는 기부금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카이스트에 일임했다.

카이스트는 기부금을 바이오및뇌공학과·문술미래전략대학원 설립 등에 사용했고, 정 전 회장의 이름을 딴 건물도 지었다. 그런데 ‘정문술 빌딩’ 준공식에 정작 주인공인 정 전 회장이 나타나지 않아 카이스트 측이 당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신기술이 나오기 전에는 찾지 않겠다”고 다짐한대로 8년이 지난 후에야 카이스트를 찾았다고 한다.

정 전 회장의 행보를 정리해 보면 국내 1세대 벤처사업가로서 ‘미래에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개발’을 추구하는 ‘벤처 정신’과 이 정신이 꽃피울 수 있도록 밑거름을 주는 ‘기부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재산을 우리나라의 기술 발전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않으려 가족을 회사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동창회와 고향에도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직원들이 개발에 필요하다고 하는 비용은 아낌없이 지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글로벌경제 수준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100여 년 전 ‘강철왕’ 카네기 이후 기업인의 기부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근래에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이 2006년 자신이 가진 버크셔해서웨이 주식 전량을 기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후 지난해까지 총 65조 원을 기부했다. 또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와 CNN 창업자 테드 터너 등도 기부·자선사업으로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정 전 회장의 기부는 국내 기업인들의 기부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이수영 광원산업회장·류근철 박사·김재철 동원 명예회장 등도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카이스트에 각각 500억 원 이상의 ‘통 큰’ 기부를 했다. 정 전 회장은 떠났지만 빛나는 그의 기부 정신은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으로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란다.

스카이데일리 skyedaily@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