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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인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 도시에서 태어난 내가 섬 소년이 되어 눈물 날 것 같은 석양의 바다를 상상하는 게 행복해서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건 그러니까 고독과 그 슬픔까지 껴안고 가는 감정이다.”
황주리 작가는 소설 ‘마이 러브 프루스트’ 서문에서 소설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 제목 만으로 ‘구십 프로 먹고 들어가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마이 러브 프루스트’도 80%는 먹고 가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쓰는 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프루스트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프루스트가 건네는 따뜻한 홍차 한 잔과 마들렌 한 조각을 받아 드는 일이다.
바다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석양의 바다를 상상할 권리가 있듯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을 찾아 나설 권리가 있다. 프루스트가 그것을 가르쳐 준다.
황주리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것은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른 8월말이었다. 너른 작업실을 가득 메운 것은 ‘식물학’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이었다. 최근에 작가는 대형 그림들과 함께 돌·안경 등 새로운 오브제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일곱 개의 이야기 ‘마이 러브 프루스트’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그런 일은 가능한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은 없을 테지만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노래한 에디트 피아프처럼 나도 언젠간 그런 말로 내 인생을 정리할 것 같다.”
짧게 대답하는 작가의 얼굴은 여유 있고 밝았다.
이번에 출간된 ‘마이 러브 프루스트’에는 총 7편의 소설이 등장한다. 마치 다양한 스토리를 모티브 삼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그의 ‘식물학’ 연작을 보는 듯했다.
7편의 작품 중 인상적이지 않은 게 없었지만 특히 ‘카페 프루스트’ 편은 판타지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영화란 소설과 그림을 합쳐 놓은 장르가 아닌가 싶다.
“영화는 내 청춘의 고독을 달래준 산소호흡기 같은 존재였다. 80년대 중반 나는 삭막한 뉴욕에서 하루 열시간 씩 그림을 그리면서 일주일에 이틀은 내내 영화만 보았다. 하루 3~4편은 기본이었다.”
당시 뉴욕에는 예술영화전문관이 여럿 존재했다. 작가는 맨해튼의 필름포럼·안젤리카 필름 센터·월터리드 씨어터 등을 돌며 1000편도 넘는 영화를 보았다. 서른에서 마흔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만난 영화들은 어떤 연인과의 사랑이 남긴 기억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그의 정신적인 피와 살을 만든 건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담 프루스트’ 편에는 ‘프루스트는 타인을 위한 하나의 명품 브랜드’라는 말이 나온다. 인생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의해 완성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명품으로서의 인간이란 어떤 사람일까?
“명품인간이란 사람에 따라 정의가 다르겠지만 나는 매순간 진화하는 인간이 명품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장점이나 단점에서조차 자신을 보는 사람 그리하여 매일 배우는 사람이 명품이다. 나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모든 일들에 참여해 준 사람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 겸허한 사람이 명품인간이다.”
황 작가는 끝까지 읽는 사람이 드문 그 책을 사실 모든 사람이 다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을 남긴 프루스트는 영혼의 명품 브랜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이 책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꾸준히 팔린다고 한다.
매일 진화하는 쿼런틴 인간
‘프루스트 책방’은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물려 준 헌책방을 운영하는 쿼런틴 인간형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프루스트는 쿼런틴 인간형이었다. 프루스트만 그렇겠는가. 카프카도 니체도 슈베르트도 베토벤도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다 쿼런틴 인간형이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는 고독이 정상이 된 사회를 지나왔다. 그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어려서부터 고독에 익숙했다. 학교 가기 싫어하고 광장보다는 동굴을 사랑했다. 다락방에 숨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선지 나의 코로나19 시기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넷플릭스를 실컷 볼 수 있었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1949년 ‘신태양’ 잡지를 발간한 황준성 대표다. 아버지 덕에 그는 어릴적부터 책을 가까이 했다. 그는 삶이 매 순간 여행이라고 전한다. 사람과의 만남도 연애도 독서도 영화 속의 장면들도 꿈속의 길들도 모두 여행이라는 것이다.
‘프루스트 책방’ 편에서 작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는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자 정체성처럼 보인다. 다른 편의 ‘마담 프루스트’는 무슈 프루스트를 대신 해서 그림을 그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하는 남편과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아내의 모습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에세이를 오래 써왔지만 소설을 쓰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그린 그림이 다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 매체가 다를 뿐 내가 하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소설쓰기로 세속적 성공을 거두고싶은 생각은 없다고 고백한다. ‘그림 그리는 작가’ 헤세처럼 ‘소설 쓰는 화가’ 황주리면 족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람들에게 나의 글쓰기가 내 그림을 이해하는 멋진 텍스트가 되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 대다수가 유산 상속자다. 그 유산에는 그것을 물려 준 이의 아픈 사연도 함께 딸려 온다. 어쩌면 우리는 선대의 상처와 영광을 동시에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선대의 선대의 선대의 끝없는 유전자의 상속의 결정체다. 문화란 돌 하나 올려놓는 일이다. 인류 문화연대의 한 사람으로 오늘도 돌 하나 올려놓는다. 지구가 끝날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인류가 지혜는 상속하고 폭력과 부조리는 폐기처분한다면 진화의 연대기가 될 터인데 그렇치 못함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황주리의 단어 열 개를 완성해 달라는 주문에 책에 등장하는 그림·글·커피·와인·음악·영화 외에 어머니·사랑·자유·새로움을 추가했다.
“나는 자주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모르고 있는 내 안의 가능성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나는 매일 새롭게 진화하며 살아 갈 것이다.”
매일 진화하는 인간 황주리의 내일 모습은 어떤 것일까, 기대하게 되는 2024년 9월 초가을의 어느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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