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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질문지법이 있다. 객관적인 응답을 끌어내는 조사 방법이면서도 잘(?) 악용하면 언제든 원하는 답변을 끌어낼 묘수로도 이해된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가 천양지차인 두 가지 질문은 ‘누구를 지지하는가’와 ‘누가 당선 가능성이 높은가’이다.
전자는 응답자의 직접적 기호 선택을 끌어내지만 후자는 응답자가 '과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추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근거는 래리 토드 로즈(Larry Todd Rose) 하버드대 교수가 펴낸 ‘집단 착각(Collective Illusions·21세기북스·노정태 역)’에 상세하게 수록돼 있다. 숙독해 볼 만하다.
로즈 교수는 ‘당선 가능성’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특정 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묻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특정 후보의 능력을 따지는 게 아니라고 분석한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선거에 입후보한 경우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은 후보자의 성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한다.
하지만 같은 자질을 지닌 상대편 후보자가 백인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백인 남성 후보가 더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따지고 들어가 보면 개개인의 성차별 의식이 변수일 수도 있겠지만 로즈 교수의 ‘집단 착각’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원인을 발견한다.
싱크탱크 ‘포퓰레이스(Populace)’의 사회과학 실험에서 ‘여성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좋은 미국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는 문항에 대해 응답자의 79%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고 했다.
실험에서 질문의 범위를 지역·주·국가 단위의 선거 전반으로 넓혀도 여성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유사한 수준으로 높았다는 것이다.
반면 ‘여자 후보는 남자만큼 당선 가능성이 있는가?’라고 질문을 바꾸니 결과는 크게 달랐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를 통해 이것이 실증된 바 있다. 아발란체 인사이트(Avalance Insights)가 민주당 경선을 앞두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만약 오늘 선거가 치러진다면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라고 묻자 응답자들은 조 바이든-버니 샌더스-엘리자베스 워런 순으로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질문을 바꾸자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만약 누군가를 대통령 자리에 앉힐 수 있다면 누굴 뽑겠는가?’라고 질문하자 응답자들은 워런 후보를 압도적으로 꼽았다.
정치학자 리자이나 베이트슨(Regina Bateson)은 이 현상을 ‘전략적 차별(strategic discrimination)’이라 이름 붙였다.
베이트슨의 분석에 따르면 후보를 향한 호감 또는 비호감의 차원이 아니라 유권자는 어떤 후보의 정체성을 고려해 다른 이들이 특정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거나 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투표에 나선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같은 자질을 지니고 있어도 백인 남자 후보가 백인 여자 또는 흑인 여자 후보보다 당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는 것이다.
포퓰레이스는 2019년 미국인 5200명을 대상으로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라고 물었다.
A. 관심과 재능에 따라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룰 때
B. 부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높은 커리어를 쌓거나 유명 인사가 될 때
응답자의 97%는 A를 성공한 삶이라고 답변했지만 동시에 92%는 대부분의 사람이 B를 답으로 택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본인을 제외한 다른 미국인들이 모두 유명해지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양 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로즈 교수는 우리 스스로 A를 답이라 생각하면서도 대다수가 B를 택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질문 방식에 따라 유권자가 자신의 선택보다 ‘집단의 선호’를 더 염두에 두고 답변한다는 관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미국 대통령과 해리스가 맞붙는 올해 대선에서도 이런 패턴은 더 두드러질 전망이다.
누구를 뽑겠냐는 질문지법보다 누가 당선 가능성이 높겠냐를 구분해서 묻는 여론조사 방식이 횡행하는 탓이다.
트럼프 지지자의 상당수가 ‘샤이(shy) 트럼프(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트럼프 지지 보수층)’ 성향인 것은 익히 검증된 바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미국 주류언론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강도 높게 예측했지만 실제 선거 결과는 당시 ‘아웃사이더’로 불렸던 트럼프 후보의 당선으로 귀결됐다.
언론들은 쥐구멍 속으로 숨기에 급급했다. 샤이 트럼프니 뭐니 갖가지 이유를 둘러댔지만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해리스 용비어천가에 매진하는 분위기에 심취한 듯하다.
동문서답하기로 소문난 해리스가 ABC방송 토론회에서 명료한 설명으로 세간을 놀라게 한 직후 미국 주류 언론은 해리스의 손을 들어 주며 난리법석이었다.
곧이어 ABC방송 내부 관계자가 대선TV 토론 전에 해리스 측에 질문지가 건네졌다고 ‘선서진술서(Affidavit)’를 냈다. 선서진술서는 법원의 공증을 받는 공식 문서다. 허위 사실일 경우 처벌도 감수해야 한다.
ABC에 짙게 드리워진 좌성향의 그림자는 미국을 아는 사람에겐 상식이다. CNN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트럼프를 공격하며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는 좌파 선정주의 매체로 미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유독 한국 언론들만 CNN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 같다. 한국의 보수언론을 자처하는 곳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로즈 교수의 책은 우리가 다수에 순응하는 편향성을 지니고 있어 집단 착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 스스로 침묵을 택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집단 착각의 공범이 돼 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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