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路 동서고금 <37> 망년·송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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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路 동서고금 <37> 망년·송년

임명신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27 06:30:50

동아시아 벼농사 지역엔 농경과 관련된 연말 세시 풍속이 있다. 주술적 의미가 담긴 다양한 것들이 있으나 모여서 음식과 술·음료를 나누는 게 기본이다. 현대인들에겐 가족·친지 중심의 모임보다 직장·사교 차원의 연말 모임이 더 많아졌다. 연회의 형식을 겸한 이런 자리를 예전엔 대부분 ‘망년회’로 불렀으나 일본식 표현이라 해서 차차 ‘송년회’라는 이름이 대신하게 됐다.

‘나이를 잊다’가 고전중국어 망년의 본래 뜻이었다. 이 말은 2세기 경 나이 차 서른 살 이상의 문사들 이야기를 기록한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스무 살도 안 된 니형(祢衡)과 공자 후손이라는 오십대 공융(孔融)의 교유 사례에 기반해 훗날 사자성어 ‘망년지교’가 쓰이게 됐다. 이것이 어휘적 왜곡을 거쳐 고도성장기 일본 기업문화 속에 ‘한 해의 수고를 위로하며 나쁜 기억 잊자’는 취지의 망년·망년회로 자리 잡았다.

15세기 한 일본 왕족의 33년치 한문 일기 중 1430년 12월21일 대목에 ‘나이(歲=年)를 잊고(忘)’ 춤추며 놀았다는 연가회(連歌會), 즉 시(詩) 모임 기록이 나온다. 17세기 에도시대가 되면 이것이 특권층 사람들이 그 해의 근심을 털어 버리는 행사가 됐고 근대 이후엔 더 보통사람들의 축제 형태로 변해 갔다. 이 연장선에서 메이지시대 들어 유행한 ‘무례강’(無禮講·부레이코)의 유래 또한 흥미롭다. 오늘날엔 지위 고하 안 따지고 노는 술자리를 가리키게 됐으나 기원은 꽤 유구하다.

고대 왕족·귀족들이 차 마시며 시를 겨루는 자리에서 일부러 신분을 속인 옷차림을 한 채 오로지 재능만으로 작시 능력을 뽐내는 일종의 학예 살롱이 있었는데 신분질서를 교란시킨다 하여 당시엔 금지되었다. 그러나 무사가 권력 중심으로 떠오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고대 이래의 개념이 무례강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14세기 가마쿠라 막부 말기였다. 무사란 신분 콤플렉스가 많기 십상인 계층이다. 신사에서 제사 때 쓰인 술을 참석자들에게 내리며 덕담·교훈이 겸해지는 ‘예강’을 비틀어 ‘무례강’이 됐다.

엄숙하고 진지한 행사를 마친 후 예의 안 차리고 노는 무례강 순서가 갈수록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니지카이(二次會), 즉 뒤풀이의 원조다. 평소에 얌전하던 현대 일본인들이 망년회에선 맘껏 망가지며 놀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물론 이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햐쿠닌슈(百人首·백인수) 카드놀이를 하기도 한다. 100편의 와카(和歌·일본 고유의 짧은 시) 시인 100명의 작품을 각각 하나씩 골라 놓은 게 햐쿠닌슈로 12·13세기 성립됐다. 100수 중 어느 한 구절을 읊으면 아래 구절을 알아맞히는 식이다. 윷놀이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으나 경연대회를 벌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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