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6> 서방 정보기관 뒤흔든 KGB 소령 ‘아나톨리 골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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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16 06:31:00

1984년 7월22일 영국 일요신문 ‘옵서버’는 해롤드 윌슨 전 영국 수상이 소련과 내통한 혐의로 세 차례나 영국 정보기관 M15(SS

·Security Service)의 조사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윌슨은 1964∼70년과 1974∼76년 두 번이나 영국 총리를 지낸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다. 윌슨이 간첩혐의를 받은 것은 바로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소령이 미국에 망명해 “한 야당 지도자가 소련 정부를 돕고 있다”고 제보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가 포착되지 않아 사건은 결국 무혐의로 귀결됐지만 서방세계는 경악했다.

윌슨을 스파이로 지목한 것은 KGB 소령으로 1961년 12월 핀란드 헬싱키 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망명한 아나톨리 골리친(Anatoli Golitsin)이다. 그는 KGB가 미국·영국 등을 포함한 서방국가 정보기관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침투 공작의 내용을 꿰고 있었다.

골리친은 KGB가 포섭한 많은 두더지(mole·정보기관에 침투한 스파이) 중 먼저 10명을 불었다. 여기에는 프랑스 정부 고위층에서 암약하는 ‘사파이어’라는 코드명의 조직도 들어 있었다. 또한 영국 사상 최악의 반역자로 악명 높은 킴 필비(Kim Philby·MI6 미국 지부장)가 1934년부터 KGB의 두더지로 활약했다는 정보도 제공했다. 당시 필비는 이를 눈치채고 급히 모스크바로 도주했다(본지 스파이세계 제17회). 골리친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도 KGB 두더지가 침투해 있다며 자신이 본부에서 접한 나토 비밀문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확인 결과 정확한 정보였다. 미 중앙정보국(CIA) 입장에서는 황금 알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코코넛 그로브에서 아나톨리 골리친과 그의 아내 스베틀라나의 모습(1962년). 필자 제공

골리친은 1926년 8월25일 우크라이나 피리아틴의 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학교에서 복무하다 군 정보부로 전출되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KGB에 발탁되었다. KGB 소속으로 정예 정보요원을 양성하는 고등정보학교를 수료하고 1953년 오스트리아 빈 지부에 배치되어 2년간 근무하고 본부로 복귀해 소령으로 진급했다.

전도가 양양한 젊은 요원은 KGB 핵심부서인 전략기획부(제1국)의 영·미 담당국에 6년간 근무하면서 KGB가 전개하는 두더지 공작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후에 입수된 KGB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에 업무 실수로 자신의 직위가 강등되자 고통스럽게 반응했고 자신의 실수를 지적받고 심사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골리친은 소련 생활에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골리친은 1961년 이반 클리모프(Ivan Klimov)라는 가명으로 핀란드 헬싱키 지부에 무관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자신의 아내와 7세 딸을 데리고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CIA는 골리친을 즉각 미국으로 데려와 워싱턴 D.C. 근처 안전가옥에 보호했다.

CIA 신문요원들은 골리친이 “KGB 제1국의 소령으로서 망명할 이유가 없을 만큼 전도가 양양하며 지위가 높다”고 평가하며 그의 망명에 의구심을 보였다. 골리친은 CIA 방첩부의 제임스 앵글턴(후에 방첩국장 역임)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개입으로 골리친은 앵글턴의 신문을 받았다. 그는 앵글턴에게 “CIA는 KGB의 지속적인 침투 대상이 되었다”며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는 CIA 요원이 사샤(SASHA)라는 코드명으로 KGB를 위해 암약하고 있다고 제보했다.

골리친은 심지어 KGB가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망명이 위장 망명이라고 제보할 또 다른 스파이를 망명시킬 것이라고 말하며 KGB의 역정보 기만 작전에 말려들지 말 것을 강변했다. 당시 앨링턴은 골리친을 ‘서방으로 망명한 가장 가치 있는 인사’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골리친의 제보는 워낙 방대했는데 초기 제보는 결정적 증거들이 있어 미국·영국·프랑스의 정보기관과 나토 등에 침투한 소련 스파이를 색출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골리친은 영국 정부에 침투한 KGB 슈퍼 두더지인 킴 필비·도널드 맥클린(Donald Maclean)·가이 버제스(Guy Burgess) 등 케임브리지 5인방과 블레이크와 바셀 등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들은 소련으로 도주했고 나머지는 사법 처리되었다. 또한 소련 주재 대사관에 근무했던 영국 해군본부 소속 존 바셀·캐나다 외교관 존 왓킨스·프랑스 요원 조르주 파케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게 골리친이 제공하는 밑도 끝도 없는 단서만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앵글턴이 미 정부 및 CIA에 침투한 슈퍼 두더지를 색출한다고 판을 벌여 CIA 내부가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바람에 조직이 망가질 지경이었다. 대표적으로 CIA 소련 지부장인 데이브 머피를 비롯한 100여 명의 요원이 부당하게 KGB 스파이로 의심받았고 결국 거듭된 조사로 그들의 경력은 망가졌다.

그 사례 중 하나는 1964년 1월 소련에서 망명해 온 유리 노센코(KGB 제7부의 부국장)에 대한 골리친의 평가였다. 노센코가 소련이 위장 망명시킨 요원이라는 것이었다. 앵글턴은 골리친의 판단을 믿고 노센코를 3년간이나 억류하며 강압 조사를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해리먼(W. Averell Harriman)도 소련 스파이였으며, 후에 영국 총리가 된 윌슨도 소련 스파이였다고 골리친은 증언했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가 뒷받침되지 못해 ‘마녀사냥’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1974년 앵글턴의 불법행위가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임했고 골리친의 영향력도 같이 쇠퇴했다. 1984년 골리친은 소련의 대외 전략을 소재로 ‘옛날을 위한 새로운 거짓말(New Lies For Old)’을 저술했으나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골리친은 2008년 12월29일 82세로 사망하며 ‘두더지 색출의 장’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