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뛰는 기업과 걷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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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임신이 드러난 비밀
기업은 생존 위해 고객 철저히 분석
정부는 민생 위해 국민 삶 분석하나?

이상준 산업경제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0-18 00:02:40

“관리자 나와!” 화난 남자가 대형마트에 나타났다. 광고지를 든 채 따졌다. “내 딸이 고등학생인데 임신을 부추기는 거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관리자는 머리를 조아렸다. 여고생에게 발송된 우편물에는 임산부와 갓난아기용 상품 광고가 가득 했다. 관리자는 며칠 뒤 전화로 또 사과했다. 그러나 웬걸, 남자는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딸과 이야기했는데 임신했답니다. 소란을 피워서 매우 미안합니다.” 미국 대형마트 타겟이 부모도 몰랐던 여고생 임신을 알아챈 이야기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알려졌다.

타겟은 오랫동안 고객을 관찰했다. 통계 담당자 앤드루 폴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성 고객들은 임신 초기에 향이 없는 로션을 샀다. 아울러 칼슘과 마네그슘 보충제도 많이 팔렸다. 타겟은 소비자 습관을 분석해서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고 고객에게 필요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광고지에 담았다.

예를 들면 애틀랜타에 사는 여성이 물건을 넣을 공간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는 가방과 마그네슘 보충제를 샀다. 고객관계관리(CRM) 분석자는 임신 확률이 87%이고 출산일이 5개월 뒤라고 예측했다. 여러 고객의 구매 행태를 분석한 결과 가방은 기저귀를 넣는 용도일 거라는 추론은 정확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진화를 거듭한 끝에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됐다.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어느덧 도구(CRM)를 사용해서 예언자 수준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파베르)은 인공지능(AI)급 도구를 활용한다.

경제학은 오랫동안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전제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말했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과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가격)은 시장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합리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샤넬과 에르메스 가방은 실용적이지 않지만 매우 비싸게 팔리고 서울 아파트는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줄지 않는다. 명품과 강남 아파트에 집착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가격보다 심리적 만족에 매달린다. 행동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란 최적(optimizing)보다 만족(satisfying)에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경제학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았던 기업들은 끊임없이 고객을 탐구한 끝에 부모조차 몰랐던 여고생 임신까지 알아채는 족집게가 됐다.

대출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정보는 무엇일까. 다음에서 검색하면 서민금융 지원기관이 결과로 나온다. 그러나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온갖 대출광고와 대출비교가 쏟아진다. 네이버와 다음은 정부가 추진하는 불법사금융 척결 태스크포스(TF)와 협의해 대출 관련 검색에서 대출 광고 대신 서민금융진흥원을 먼저 노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네이버는 “관계 법령상 문제가 없는 광고를 거부하거나 검색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다음과 비교할 때 네이버가 돈벌이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도덕이 아닌 수익이란 기준으로 보면 매출과 수익이 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신용카드사 임원과 식사했다. 대화 주제는 금융이 아닌 민생이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로 서민의 삶이 눈에 띌 정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학에만 능통한 정부 관료 처지도 딱하다.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춰야만 했다. 금리를 낮춘다는 소문에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했고 서울 집값도 들썩였다.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금융당국은 금융사에 가계대출 억제를 종용했다. 게다가 해마다 걷히는 세금이 부족하지만 법인세 감면은 대통령 공약이다. 정부가 민생을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해도 쓸 돈이 부족한 셈이다.

맥주를 들이켠 뒤 발상의 전환이 생겼다. “대통령실에서 연락이 왔으면 좋겠어요.” 카드사 등이 가진 통계를 꼼꼼히 따져서 활용하면 적은 예산이나마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타겟이 임신 사실을 숨겼던 여고생에게 꼭 필요한 상품을 추천한 것처럼 말이다. 나라 곳간을 걱정하는 언론인과 금융인은 민생이 나아지길 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정부가 뭔가를 해야 할 텐데 도무지…, 민생에 쓸 돈이 부족할 게 뻔하니 제대로라도 썼으면 좋겠어요.” “우리 회사에도 전문가들이 많아요. 어디서 장사하는 서민이 얼마나 어떻게 어려운지 꿰차고 있어요. 혈세를 낭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쓰도록 도울 자신이 있어요. 정부가 요청하면 얼마든지 도울 걸요!”

이상준 산업경제부장·부국장 jun@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