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전공이지만 동양화의 제한을 넘으며 작업해온 화가 허진의 36번째 개인전이 서울 광화문 갤러리 내일에서 20일부터 내년 1월1일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은 ‘에피소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포효하는 듯 번지는 먹으로 시대의 착종과 문명의 착란을 그리며 야심 찬 청년 화가로 떠올랐던 허진. 세월과 더불어 화가의 머리는 은빛이 되었지만 청년의 기색은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고 있다. 평상시 행동에서 묻어나는 거침없는 패기와 은근한 장난기가 그러한 판단의 근거다.
전시장에는 허진 화가가 수년 전부터 천착해 온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 시리즈와 함께 드로잉이 걸려 있다. 그간의 작업을 쌓아 올리는 데 토대가 되었던 드로잉들이다.
연필로 혹은 펜으로 그린 드로잉에서 화가의 관심과 흥미가 전달된다. 시대와 역사를 거쳐 자연과 문명의 그림자를 뒤쫓는 그의 그림은 특히 작업의 밑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드로잉들은 그 자체로도 완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색칠이 더해져 더 육중한 작업으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과정적 맥락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화가는 이번 전시를 자신의 굵직한 전시회 사이의 작은 이야기처럼 꾸몄다. 주된 줄거리에 곁들인 작은 이야기를 의미하는 ‘에피소드’처럼 경쾌함과 산뜻함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허진 작가는 말한다.
“에피소드라는 말은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삶의 줄기에서 불쑥 솟아오른 예상치 못한 작은 가지 같다고나 할까요?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는 우리에게 차이를 생성하게 하고 삶의 풍부성을 제공하지요.
우리는 대화하다가 에피소드를 꺼낼 때가 있어요. 뻔한 미사여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는 때로 맥락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긴장을 형성하고 변화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제 작품 속 동물의 세계에는 생각지 못한 사물이 오버랩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모호성과 애매성도 에피소드와 연결됩니다. 하나하나 어떤 기억과 연관되고 거기서 에피소드가 만들어지지요.”
허진 작가 특유의 화면을 생성케 한 밑받침 작업과 함께 미래 작업의 발판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 ‘에피소드’의 독특함이 있다. 힘 뺀 그림으로 긴장이 풀어지니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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