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2] 학생의 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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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09 06:30:08

시험 기간에 도서관 자리를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도서관에서 자리를 맡지 못한 학생들은 빈 강의실로 갔다. 연일 벌어지는 시위에 빈자리가 많았던 강의실조차 시험 기간만큼은 학생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공간으로 존재했다. 승연이나 은영이 도서관 자리를 못 찾아 헤맬 때 가끔 마주치는 윤희숙은 자기 자리를 후배에게 양보하곤 도서관을 나섰다. 윤희숙이 공부하는 모습은 진지했다.

은영에 의하면 윤희숙은 시험 기간에도 학과 공부와 운동 서적 탐독을 병행했는데 한번 자리에 앉으면 대여섯 시간 동안 꼼작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실조차 가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선배도 있었다. 다른 운동권 학생들처럼 수업을 빼먹는다든지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고도 했다. 윤희숙 이미지는 운동권 학생과 어울리지 않았다. 부모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느낌이 풍겼던 게 사실이다. 주먹 불끈 쥐고 이마에 띠를 두른 채 돌멩이질하는 거친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다고 공책 옆구리에 끼고 하이힐 신으며 부르주아 여학생 놀이하는 모습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좋은 옷을 입고 비싼 구두를 신었다면 영락없는 부잣집 딸이었다. 윤희숙에게 올리비아 핫세라는 별명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여배우와 닮은 곳이 많았다. 흰 피부와 적당히 부풀려진 가슴, 가느다란 손가락, 고급스러운 말투에선 귀족의 품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은영은 윤희숙이 긴 생머리 이대생이었을 때는 정말 올리비아 핫세 판박이었다며 마치 이대생 시절의 윤희숙을 본 것처럼 감탄하며 말했다. 옷 몇 가지의 단벌 숙녀였지만 항상 깔끔했고 가진 자의 당당함마저 느껴지곤 했다.

윤희숙은 깐깐하면서도 친절했다. 그러나 손을 먼저 내밀기는 해도 포옹은 허락하지 않는 사람처럼 어딘지 모르게 경계가 느껴졌다. 그 느낌은 윤희숙이 만든 것이 아니라 승연이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 가까워지면 상처받을 것 같고,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 같은 예감이 그랬다. 승연은 윤희숙이 궁금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가까이했다가 운동권에 빠질까 봐 거리를 두었다.

김태주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이따금 그를 보긴 했는데 그저 휙 지나는 정도였다. 어쩌다 마주치면 손을 들거나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받아 주긴 하면서도 말을 걸거나 일부러 아는 체를 하진 않았다. 그는 시험 기간에도 도서관엔 나타나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다는 얘기가 들렸는가 하면, 자취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한다는데 그가 거기서 뭘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윤희숙은 김태주의 동선이나 행방을 아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김태주를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가끔 박철규에게 김태주 선배는 왜 요즘 안 보여? 물으면 박철규는 김태주 선배 행방은 신도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어디서 공부하는지,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오산이 아니라 서울 종로에서였다. 아주 우연히. 그러나 기억은 잠시 거기서 머물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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