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면서도 다정하게 지냈던 최명철의 3분대
3분대장 최명철은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원유가공 업체인 승리화학공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 입학한 관계로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다. 구수한 입담이 특기인데 1학년 때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줄곧 3분대장을 역임하면서 화려한 언변과 부드러운 설득력·솔선수범의 자세로 분대원들을 잘 이끌어 친구들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
이정길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독학으로 배운 기타 솜씨가 대단한 친구였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운동에는 소질이 없는지 격술을 포함해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특이한 건 이 친구가 4학년 때 미리 복제해 놨던 키로 대학 주차장에 세워 놓은 승용차 시동을 건 다음 밤새도록 평양 시내에 돌아다니는 등 자유주의(무단 외출)를 하다 경찰에 걸려 불명예 제대할 뻔 했는데, 대학 부학장이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배짱이 좋다’며 용서해 준 바 있다. 부학장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는지 이정길은 작전부 산하 남포연락소에 배치된 후 내가 1995년 2차로 남파될 때 나를 제주도 온평리까지 안내해 주는 등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당시 이정길과 만난 것이 대학 졸업 후 10년 만이라 너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이광철은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반곱슬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한 친구였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친구였고, 파티할 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형남은 압록강 국경인 자강도 중강 출신으로 트럼본 나팔을 아주 잘 불었다. 중앙 무대에까지 올라가 예술 경연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독주까지 할 정도였다. 키는 168cm 정도로 큰 키는 아니었지만,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만능 운동선수였고 운전 또한 능숙했다. 특히 그는 격술 동작이 너무 정확하고 멋이 있는 데다 품새를 잘했다. 성격은 부드럽지만 호불호가 분명하고 나와도 각별히 지냈던 절친이다.
김철은 평안북도 동림 출신으로 곱상하게 생겼다. 성격도 얌전하고 말이 없고 착한 친구였다. 대학 3학년 때 격술을 하다가 상대방이 뒤에서 두 팔까지 감아 잡고 거꾸로 내리꽂았는데, 낙법을 잘못해 쇄골이 부러져 수술을 받아야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대동강 도하를 할 때 어깨 통증으로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해 내가 그의 짐(30㎏)까지 메고 대동강을 건너가느라 상당히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늘 달고 살았던 잊을 수 없는 친구다.
나성봉은 평안남도 회창 출신으로 말수가 적고 근육질의 몸매에 기계체조를 특히 잘했다. 한번은 이 친구가 철봉에 매달려 강하게 흔들기를 하다가 공중에서 철봉을 놓쳐 떨어지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나와 다른 친구가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군의관이 응급조치를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축 늘어진 그를 업고 100m 정도 떨어진 군의소까지 가는데 얼마나 무거웠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명수는 황해북도 신계 출신으로 나와 함께 평양에서 공작원 선발을 위한 신체검사 및 면접 심사 때부터 시작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에 위탁교육생으로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같은 소대에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절친이다. 얼굴색은 물론 피부 전체가 하얗고 생김새도 남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성격도 여성스러운 면이 더 많은 친구였다. 머리가 좋아 학과 성적이 좋았고, 특히 미술 실력은 천재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와 함께 대학 졸업 후 연락부 공작원으로 임명돼 일본 공작과에 배치받았으나, 1988년 경 관절염이 심해 전역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다.
윤현철은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어서 그런지 수영 영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주로 하는 평영을 특히 잘했다. 키가 167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수영 실력은 소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상반신을 물 위에 거의 내놓고 평영으로 수영을 하는데 그냥 물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빨랐다. 이 친구는 우리 소대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김정일을 경호하는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강영환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키가 163cm로 작은 편이었다. 공부든 훈련이든 못하는 것 없이 모두 잘하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의지가 강하고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의 정신력과 투지가 마음에 들었다. 수류탄 투척 훈련할 때 다른 친구들은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그냥 던지는데, 이 친구는 안전핀을 뽑고 가철을 놓은 상태에서 2초 후에 던져 주변 친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적이 있다. 참고로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고 가철을 놓으면 ‘딱’ 하고 뇌관을 때리는 소리가 나고 그때부터 3초 후에 터진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그걸 알고 2초 후에 던진 것이다. 가끔 잘못 제조된 수류탄도 있어서 그렇게 하면 정말 위험하니까 못 하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모험심 강한 친구였다.
김철호는 황해남도 과일이 고향이다. 특별히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친구였다. 말없이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잘하는 친구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가끔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행동을 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던 4차원이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최영철은 평양시 선교구역 출신이다. 평양 출신들이 대체로 그렇듯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말만 많은 친구였다. ‘대남=죽음’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1학년이 끝나갈 즈음 자해 소동을 피워 곧바로 불명예 전역했다.
이렇게 내가 소속되었던 소대에서는 4년 동안 총 5명(최철민·배국남·주성일·송광철·최영철)이 졸업을 못 하고 중도 퇴학해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3학년 때는 백두산을 비롯한 양강도 지역의 혁명 전적지·사적지들에 대한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1개월 동안은 평양시 삼석구역 대동강 기슭의 김정일별장 건설 현장에 동원되어 건설 노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지 5년 만인 1990년 남한에 침투해 공작임무를 수행한 뒤 복귀해 이선실과 권중현·황인오 등과 함께 대학 3학년 때 건설에 참여했던 김정일별장 옆 초대소에 묵은 적이 있었다. 이때 별장은 이미 완공되어 있었고 호위국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득도한 4학년
4학년생이 되면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실습과 훈련·관광 등을 위해 외부에 나갈 때 군인들과 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학년 때까지는 몸이 근질근질해서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싸우는 경우가 많지만 4학년이 되면 싸움 자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가능하면 피하는 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한편, 졸업반인 4학년에 올라가면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야외 훈련을 진행한다. 훈련 비중이 전체 교육의 70% 정도를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모든 종목의 훈련은 예전처럼 2·3주 정도 실시하는 단기 훈련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야외에 나가 텐트를 치거나 비트를 파고 숙영하면서 하는 장기 훈련이었다. 훈련 기간만 해도 5~11월, 약 7개월에 달했닫. 7개월간 실내에 들어가는 경우 없이 계속해서 야외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4학년에 올라와 새로 배운 과목은 핵공학과 전기공학·화학공학이었고, 여기에 정보학 과목이 추가되었다. 핵공학과 전기공학·화학공학은 남북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에 침투해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는 물론 변전소와 고압선 철탑·화학공장 등을 파괴함으로써 남한의 기간산업을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편성된 과목이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기본 원리와 화학공장 및 전자제품 공장의 일반적인 구조와 핵심 설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말하자면 공학적인 측면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한의 전력망을 마비시키고 화학공장을 파괴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힐 것인가를 위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습 명목으로 평양화력발전소와 남흥청년화학공장(평남 안주)·평양10월5일자동화종합공장 등을 방문해서도 그곳 엔지니어들에게 “발전소를 완전히 멈추게 하려면 어디를 폭파하면 됩니까?”는 수준의 질문을 하는 정도였다.
이 외에는 기존부터 해 오던 전술·기술적인 과목들에 대한 강의와 훈련을 계속 진행하는 정도였다. 여기에 국군 훈련과 오토바이 운전 훈련·유격 전술(비정규전) 훈련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11월에는 대동강 도하에 이어 1500리 강행군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1개월간 특공대 전투사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특수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훈련들도 진행했다.
1개월간의 국군 훈련
4학년 때 처음으로 받은 훈련은 국군 훈련(‘괴뢰군 훈련’으로 지칭)이었다. 국군 훈련은 대남침투 요원들이 남한에 침투할 때 주로 국군 복장을 착용하고 군인으로 행세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위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훈련은 대남 침투 시 남한 땅을 직접 밟아야 하는 특공대반 4학년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당시 4학년에는 특공대반 3개 소대에 인원이 90명가량이었는데, 3개 소대가 다 같이 국군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훈련 기간에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독좌저수지 기슭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아침에 기상해 구보와 목봉 체조 등으로 아침 운동을 하고 일조 점호·제식훈련·집총훈련·총검술·학과 출장·일석 점호 등 저녁 취침 때까지 국군의 일과표를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훈련했다.
이러한 훈련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교관들이 과거 남한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월북한 국군 출신자들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은 다음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훈련 기간에는 국군의 얼차려 중 하나인 ‘원산폭격’도 했고, ‘진짜 사나이’와 ‘육군 김일병’ 등의 남한 군가도 가르쳐 주고 행진할 때 큰 소리로 부르도록 했다.
또한 국군 훈련 기간에는 그해 겨울에 예정되어 있던 대동강 도하에 대비한다면서 아침저녁으로 저수지에서 수영 훈련을 하는 방식으로 냉한 극복 훈련도 했다. 그때가 5월 초였기 때문에 저수지 물이 너무 차가워서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대동강 도하 대비 수영 연습 및 냉한 극복 연습은 실제로 대동강 도하를 진행한 그해 11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세상에 태어난 제 모습을 제일 처음 보았을 때 아버지는 기분이 어땠나요?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나요? 친정 쪽 가족이 없는 엄마가 혹여 마음 아파하실까 봐 그런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아끼셨던 지인 분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축하를 해 주었다고 엄마가 그러셨는데, 처음으로 저를 안은 엄마는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먼저 났다고만 하시던데….
아버지: 네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북에 계시는 부모님이었어. 부모님께서 손자를 봤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나도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이 울었지.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쁘던지 그때의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
네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첫째에 이어 둘째도 아들이 태어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은 딸도 있어야 좋다고 하는데, 난 아니었거든. 왜냐하면 한국에 친척이 없는데 너희들이 같은 남자니까 서로 의지가 되고 마음도 든든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네가 태어났을 때만큼이나 엄청 좋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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