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둘째 월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로 완전히 복원하겠다고 선언했다. 27일(현지시간)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 글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돌아온다”며 이 날을 과거 수십 년 유지됐던 동일한 규정·날짜에 맞춰 되살린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당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콜럼버스 명성을 파괴하고자 했다”며 이런 경향이 워키즘 즉 깨어있음주의(Wokesim) 흐름 속에 진행돼 2020년 6월 콜럼버스 동상이 훼손된 점도 짚었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은 20세기 후반 이래 여러 주(州)에서 ‘원주민의 날’로 기념돼 왔으며 근년 첨예한 역사관의 충돌이 부각됐다. 트럼프는 10년 전 정계 입문의 명분 자체가 역사관·세계관 전쟁이기도 한 점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개척·모험 정신의 상징인 콜럼버스 대신 그 과정에서 피해 입은 원주민 중심으로 과거사를 바라본 시각이 피씨즘(정치적올바름주의)과 그것의 심화 버전인 워키즘을 통해 힘을 얻었다. 지난 20~30년 학계·언론계 등 지식인 사회 대부분, 나아가 그간 미국에서 인문·사회과학 쪽 전공을 한 사람 모두 여기서 자유롭기 힘들다.
2020년 대선 때 ‘트럼프 깜짝 승리’의 배경을 피씨즘과 이에 편승해 부·명예를 누리는 엘리트들을 향한 백인 서민층의 분노에서 찾기도 한다. 그 연장에서 2기 트럼프가 역사전쟁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 트럼프 진영에선 ‘신대륙 발견’과 ‘미 건국’의 긍정적 관점이야말로 자국민들이 공유해야 할 부분이며, 이를 점령과 학살로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미국=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반미’ 의식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콜럼버스로 상징된 ‘탐험’ ‘개척’ 정신과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에 기반한 인류 최초 자유민주공화국 탄생이 미국사의 큰 줄기라는 관점이다.
20세기 중후반 이래 미국 개척사를 백인에 의한 원주민 착취·약탈로 기술한 역사가 소련 해체 및 탈냉전시대 들어 급성장해 지식인 사회에 뿌리내렸다. 2019년 뉴욕타임스 주도의 ‘1619 프로젝트’는 상징적이다. 첫 아프리카 노예들이 버지니아에 도착한 해를 미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아 모든 것을 노예 및 노예제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콜럼버스 기념을 식민 침략·유산·가부장제 미화로 간주한다. 이 기준에 의거해 미 주요 대학 커리큘럼이 짜여지면서 고전적 문학·미술·음악 작품들은 대거 삭제당하게 됐다.
이에 정면으로 맞선 게 트럼프와 그 지지층이다. 콜럼버스보다 원주민을 기념하도록 이끄는 게 ‘비판적인종이론’이다. 이런 역사 해석에 일찍부터 반감을 드러내 온 트럼프가 이번 SNS 메시지를 통해 구체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2020년 첫 임기 당시 콜럼버스의 날을 “미국 역사·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날”로 재정의했다. 미국 내 역사 인식이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인 가운데 이뤄진 결정이었다. 미 역사 전쟁의 중요한 장을 연 셈이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50개 주 가운데 16개 주만 ‘콜럼버스의 날’ 명칭을 공식 사용한다.
2021년엔 조 바이든이 현직 대통령 최초로 원주민의 날 기념포고문을 발표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토지 강탈, 전염병 확산, 강제노동·학살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500년 서유럽인들의 행보를 단순 악마화할 경우 문명사 자체가 부정될 딜레마에 빠진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상태였던 지역에 철기문명을 소화하고 흑사병까지 겪으며 면역력을 기른 사람들의 도래란 문명의 진보를 향한 발걸음의 일부이기도 한 점, 잔혹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 망각되기 때문이다.
이날 AP통신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늘면서 이들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콜럼버스 띄우기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정작 콜럼버스는 현 미국 영토를 밟아 본 적 없으나 1792년 뉴욕시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300주년 첫 공식 기념행사가 열렸고, 1869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단체들이 콜럼버스를 적극 기념하기 시작했다. 193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방 차원의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으며 1968년 ‘월요일 공휴일 법안’이 통과되면서 날짜가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옮겨져 1971년 콜럼버스의 날이 공식 연방 공휴일이 됐다.
한편 1977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비정부기구(NGO) 회의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대신한 ‘원주민의 날’을 제안한 이래, 1992년 미 캘리포니아주 버클리가 콜럼버스의 날을 폐지하고 처음 ‘원주민의 날’을 공식 채택했다. 마침 이 해가 콜럼버스 신대륙 도착 500주년이었다. 이후 점점 더 많은 도시와 주가 이를 따라하게 됐고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의 선언문 발표에까지 이른 것이다. 앞으로도 역사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미국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고 현재와 미래를 모색할지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과거 콜럼버스의 날엔 퍼레이드와 축제 등 다양한 기념 행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엔 이런 관행의 축소 내지 취소되면서 원주민 권리·문화를 일깨우는 행사 및 교육 프로그램이 우세하다. 워싱턴DC 외 최소 14개 주(알래스카·하와이·아이오와·루이지애나·메인·미시간·미네소타·뉴멕시코·오리건·사우스다코타·버몬트·워싱턴·위스콘신)는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않으며, 사우스다코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만 따로 기념한다. 오클라호마에선 도시마다 토착 부족명을 딴 이름으로 구(舊)콜럼버스의 날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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