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공포,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 열기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벤처투자 규모는 1년 만에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투자금 중간 회수 역할을 하는 장외시장과 회수 출구인 기업공개(IPO) 시장도 위축되는 분위기다. 막연한 성장성 보다는 수익성도 갖춘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가 몰리는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뜨거웠던 작년 스타트업 투자와 딴판… “투자 둔화 시작‘
스타트업 정보업체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글로벌 벤처 투자 금액은 총 1600억달러(약 200조원)로 집계됐다. 직전 분기(1840억달러) 대비 13.0% 감소한 수준이다. 2분기에도 비슷한 양상을 이어갔다. 4월 벤처 투자액은 470억달러(약 59조원)로 지난해 4월(540억달러) 대비 13.0% 급감했다. 이는 작년 2월(420억달러) 이후 14개월 만에 최저치다. 크런치베이스는 “지금 분위기는 작년 한 해 뜨거웠던 스타트업 투자 시장과 딴판”이라며 “올해 1분기 시작된 투자 둔화가 장기화하는 조짐이보인다”고 분석했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도 마찬가지다. 벤처기업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스타트업·중소기업의 총 투자 금액(투자, 구주인수, 크라우드펀딩)은 1조1129억원으로 전달(2조1223억원)과 비교해 47.6% 줄었다. 작년 5월(3조5325억원) 대비로는 68.5% 빠졌다. 지난해 11월(1조449억원) 이후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금액이다.
특히 후기 투자가 더 저조했다. IPO에 가까운 기업일수록 투자사들이 몸을 사렸다는 얘기다. 올해 들어 3일까지 스타트업·중소기업의 상장 전 투자 유치(프리IPO) 투자액은 6911억원(1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조3792억(23건) 대비 49.9% 감소했다. 시리즈 C~G단계에 있는 기업들의 투자액도 4조1390억원(57건)에서 3조4517억(63건)으로 16.6% 줄었다.
1000억원 이상 프리IPO 투자는 티빙이 2월18일 2500억원을 유치한 게 마지막이었다. 상장 전 몸값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시리즈 G단계 투자는 3월7일 차량공유업체 쏘카(1832억원)를 끝으로 멈췄다. 시리즈 E·F단계의 대규모 투자는 없었다. 시리즈 D단계의 경우에는 4월 버킷플레이스(2350억원), 1월 뮤직카우(1500억원) 등이 전부였다.
반면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뜨거운 분위기다. 올해 시드(Seed) 투자는 3일까지 1479억원(206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587억원)과 비교해 152.0% 늘어났다. 시리즈 A·B단계 투자도 2조7203억원(293건)에서 5조6202억원(359건)으로 106.6% 급증했다. 천연물 신약업체인 보타메디(8022억원) 등 1000억원 넘는 투자도 11건에 달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빅스텝으로 상징되는 급속한 유동성 회수가 예고됐다”며 “스타트업 투자는 고위험 투자인데 실물경제와 금융이 단기간에 축소지향으로 돌아선 지금 위험투자가 축소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 스타트업 성장세가 꺾이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LG엔솔 제외 IPO 공모금액, 전년比 8분의 1 수준
엑시트(투자금 회수) 수단인 IPO의 부진이 상장을 앞둔 후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기대를 한풀 꺾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5월 IPO 공모금액은 총 13조4711억원으로 전년동기(5조6327억원) 대비 2배 이상 늘었다. 1월 상장한 LG에너지솔루션이 12조7500억원의 공모자금을 유치한 덕분이다. LG에너지솔루션을 제외하면 공모금액은 7211억원으로 쪼그라든다. 지난해의 8분의 1 수준이다.
이 기간 상장한 기업 수는 37개로 작년 1~5월(51개)에 비해 30% 가까이 줄었다. 대부분 공모금액 500억원 미만 중소기업이었다. 공모금액이 수천억원 이상인 대어(大魚)들은 공모자금을 모으지 못해 상장 계획을 접었다. 해당 기업은 현대엔지니어링, 대명에너지, 보로노이, SK쉴더스, 원스토어, 태림페이퍼 등 6곳이다. 이 가운데 대명에너지는 지난달 16일 재도전해 코스닥시장에 입성했고 보로노이는 이달 공모주 청약을 진행할 계획이다.
장외시장도 얼어붙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한국장외주식시장(K-OTC) 누적 거래대금은 3830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같은 기간(6781억원) 대비 반토막 수준이다. 이 기간 누적 거래량은 9809만주에서 6957만주로 크게 줄었다. 시가총액은 연초 30조원대를 유지하다가 4월 25조원대로 크게 줄어들더니 5월 21조원대로 내려앉았다.
비상장사의 주가도 하락하고 있다. 증권플러스 비상장에 따르면 7일 현재 쏘카의 주당 가격은 5만2000원이다.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했던 4월12일(8만원)과 비교해 35.0% 떨어졌다. 3월 말 상장예비심사를 신청한 컬리도 3월31일 10만9000원으로 최고가를 찍었지만 현재 7만2000원으로 33.9% 하락했다. 지난달 50대 1 비율로 액면분할을 실시한 오아시스도 현재 연 최고가(220만원) 대비 19.8% 떨어진 3만5300원(176만5000원)을 기록 중이다. 연내 상장을 목표한 케이뱅크도 3월30일 2만3400원에서 현재 1만7400원으로 25.6% 내려갔다.
증권업계 “업황 회복 전까지 옥석 가리기 철저히 해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자금이 줄어들면서 무분별한 투자가 아닌 면밀한 ‘옥석 가리기’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사자성어 그대로의 옥석구분(玉石俱焚 - 옥과 과 돌이 함께 불타 옥이 돌 취급을 받는 다는 뜻)에 그친다면 전도창창한 유망기업이 가망성 없는 좀비기업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제대로 된 기술력 없이 비전만으로 창업한 기업은 밀려나고 미래 성장성과 수익성을 갖춘 알짜기업이 벤처시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 생태계가 탄탄해지고 ‘알짜 벤처’에 돈이 몰리는 현상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투자금이 많이 쏟아지다보니 적자를 내더라도 성장성만 보이면 높은 밸류에이션의 투자를 많이 받는 경향이 있었다”며 “수익성을 확보하면서 건실한 성장을 해오던 내실 있는 스타트업 입장에선 경쟁사들이 출혈 경쟁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기회다. 투자자도 이전보다 신중하게 우량한 기업을 찾아서 투자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침체된 IPO 시장도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에 대한 우려가 잦아들면 하반기에 활기를 되찾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달에만 보로노리 등 13곳(스팩 포함)이 일반투자자를 대상으로 공모주 청약을 진행한다. 3월 7곳, 4월 5곳, 5월 5곳과 비교해 크게 늘어난 수준이다. 3일 신규 상장한 청담글로벌은 3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이러한 기대를 키웠다. 수소연료와 반도체, 빅데이터 등 유망 사업을 중심으로 공모주 ‘필터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승두 SK증권 연구원은 “전방 산업의 성장성이 뚜렷하거나 실적을 잘 내는 기업의 경우 시장 분위기와 상관없이 관심을 받겠지만 지분 정리나 기존 투자자들의 수익 실현 등을 주목적으로 상장에 나서는 경우 계속해서 투자자의 외면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IPO 업황이 충분히 회복되기 전에는 옥석 가리기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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