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가난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현재도 유효하다. 국가 전체의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을지라도 찬란히 빛나는 그 성과의 뒷면에는 보이지 않는 그늘이 늘 짙게 깔려 있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한강의 기적 이면에 서울역의 노숙자들이 실존하는 것처럼. 거리의 천사들이 편히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은 천국밖에 없을까?
라두 주데 감독의 ‘콘티넨탈'25(이하 ‘콘티넨탈’)’가 유럽 영화임에도 작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성찰을 제공하는 까닭은 그 보편적 분열상을 향한 예리한 문제의식에 있다. 이 영화는 고급 호텔 콘티넨탈 부티크가 원활히 건설되기 위해 집 없는 빈자에게 퇴거를 독촉해 그의 자살을 조장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헝가리 출신 법원 집행관 오르솔리아의 진솔한 일상을 다룬다. 부유함으로 유명한 유럽도 가난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이런 영화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노숙자의 퇴거를 기다리는 동안 오르솔리아와 헌병들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건설이 예정된 콘티넨탈 부티크와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카이저(kaiser)가 언급된다. 전자는 유럽의 풍요와 그 이면에 가려진 폐해를 뜻하는 공간일 것이다. 왕실과 함께 언급되는 후자는 전자의 공간적 의미와 조립되는 맥락에서 발터 벤야민의 산문 ‘카이저파노라마(Kaiserpanorama)’를 묘하게 연상시킨다. 독일 인플레이션 일주 여행이 부제인 이 글은 전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사회적 파탄에 관한 벤야민의 철학을 담고 있다. 벤야민은 표제를 통해 당대 독일 사회의 피폐한 혼란상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면서도 그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절망적 진단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벤야민의 황제는 무력한 암군인 셈이다.
카이저파노라마가 현재 형태의 영화가 제작되기 전의 초기 영사 장치이기도 함을 기억할 때, ‘콘티넨탈’의 영화적 문법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이 열린다. 근대 영화는 활동사진으로도 불린다. 사진은 어두운 방(카메라 옵스큐라)에서 탄생했다. ‘콘티넨탈’이 어떤 진실을 밀실 안에 담아 연출하는 영화로 펼쳐지는 까닭은 이 의미망에 자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축된 결정적 장면을 하나 고른다면, 어두운 방 속의 오르솔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다룬 토니 주트의 책을 잡고 에드거 조지 울머 감독의 흑백영화 ‘우회로(1945)’를 보는 장면을 고르고 싶다. 이 장면이 오르솔리아의 실존적 고통과 영화의 사회정치적 비판을 집약한 연출로 분석돼서 그렇다. ‘우회로’는 주인공 앨이 같은 자동차에 탄 찰스 헤스캘 주니어의 우연한 죽음 때문에 살인자가 될 뻔했다가 또 다른 우연으로 누명의 위험을 피하는 이야기다. 노숙자가 자살하는 불운을 만난 오르솔리아는 자신이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법적 문제 또한 없음에도 자신이 헝가리 출신이라는 정보를 굳이 공개하는 언론으로 인해 수모를 겪는다. 치명타를 피한 앨의 행운과 달리, 빠져나갈 우회로가 그녀에게는 없다. ‘콘티넨탈’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가 슬쩍 언급됨으로써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명시되는 것에서 시작해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우크라이나 학살이 명시되는 것도 “아우슈비츠에서 출발한 죽음의 행진(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1권, 조행복 譯, 열린책들, 2019, 57쪽)”이 여전히 유럽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토니 주트가 “유럽이 어떤 종류의 장소였는지 이해하려면, 그 내부의 분열과 불화, 파열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2권, 조행복 譯, 열린책들, 2019, 531쪽).”라고 주장하듯, 유럽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궁궐로 본다면 그 궁궐의 후원(後苑)에는 노숙하는 빈자가 어두운 진실로서 있다. 그런 빈자에게는 행정 절차에 따라 냉혹해질 수밖에 없는 오르솔리아도 친구와 사담을 나누는 심리적 밀실 안에서는 그 친구의 빈곤 아동 후원(後援)을 돕고자 기부금을 낸다. 그녀의 이 따스한 선행도 진실인 바, 오르솔리아가 인간으로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공간의 대부분이 어두운 방임은 언론을 통한 파편적 사실과는 사뭇 다르게 영화를 통해 촘촘히 축조되는 진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콘티넨탈’이 오프닝에서는 생전의 빈자를 보여주고, 엔딩에서는 콘티넨탈 부티크의 축조에 연관된 여러 건물이 담긴 쇼트들을 파노라마처럼 연이어 보여주는 것이 촘촘한 건축술로 판단되는 이유다.
영화 ‘콘티넨탈'25(2025)’ 줄거리
오르솔리아는 루마니아에서 법원 집행관으로 일하는 헝가리 출신 여인이다. 그녀는 건물 보일러실에서 거처하던 홈리스 남성 이온에게 행정 명령에 따른 퇴거를 통보하고 독촉한다. 오르솔리아와 그녀가 데려온 헌병들이 건물 밖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온의 퇴거를 잠시 기다리던 중, 절망한 이온은 자살하고 만다. 언론은 오르솔리아가 죄 없는 빈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자극적 보도를 내놓아 그녀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한편, 오르솔리아도 법적인 문제나 책임은 없으나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스스로 통감하며 심한 고뇌를 겪는다. 오르솔리아가 이 고뇌를 자신의 남편, 동성의 친구, 내연의 남자, 신부(神父)에게 고백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그녀의 선행과 유럽의 각종 사회정치 문제에 관한 비판이 드러난다.
라두 주데 감독
루마니아의 영화감독으로서 국내외 영화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라두 주데는 ‘콘티넨탈 '25(2025)’로 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은곰상)을 수상했다. 그의 전작 ‘에브리바디 인 아워 패밀리(2012)’는 이혼 가정의 잠잠하고 권태롭던 일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진중히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전처 오띨리아와 그녀의 동거남 아우렐이 양육하는 딸 소피아를 법적으로 허가된 일정과 절차에 따라 데려가 여행을 가려던 이혼남 마리우스는 분노와 설움을 못 참은 나머지, 오띨리아와 아우렐에게 폭력을 쓰기에 이르고, 그 둘을 결박하기까지 한다. 마리우스는 경찰을 피하려고 건물을 빠져나가다가 추락해서 이마가 찢어지고 마는데, 새빨간 피로 물든 그의 몰골은 유럽 내의 뭇 가정이 직면한 분열상을 선연히 체화한 모습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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