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국내 뮤지컬 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라이센스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수출하는 나라로까지 발전했고 한류 문화를 이루는 데도 분명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둘러보면 국내에서 뮤지컬을 관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에 낯설어하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뮤지컬 산업을 지탱하는 것은 뮤지컬 마니아인 일명 ‘뮤덕’들이다. ‘n차 관람’이라는 말이 뮤덕들에겐 자연스러운 만큼 다(多)회차 관람하는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 이렇게 뮤지컬 산업은 충성도 높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니아층의 두께에는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일반 대중이 뮤지컬에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가뜩이나 뮤지컬이라는 콘텐츠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격마저 높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뮤지컬이라는 매력적인 콘텐츠가 대중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뮤지컬 산업은 활성화돼서 좋고, 대중은 만족도를 느끼는 선순환의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2%가 지탱하는 산업… 가격에 고개 돌리는 98%
12월20일 개막 예정인 뮤지컬 ‘물랑루즈’ VIP석 티켓 한 장이 18만 원에 책정됐다. 가장 저렴한 A석도 9만 원에 판매하면서 이제 뮤지컬을 한 번 관람하려면 10만 원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평소 SNS를 통해 뮤지컬에 대한 관심을 키워 온 A씨(남, 25)는 아직 뮤지컬을 직접 관람한 경험이 없다. A씨는 그 이유에 대해 “뮤지컬 1번 볼 가격이 영화 10번 보는 가격과 비슷하다 보니 부담스러웠다”며 “3시간짜리 공연을 보고나면 한 달 용돈에 큰 구멍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책정된 뮤지컬 가격을 듣고는 “배우·작품·자리 등 조건이 충족돼야 어쩌다 한 번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듯 뮤지컬의 매력을 알아도 티켓 가격이 그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통계청이 2021년 1만60명을 상대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뮤지컬을 직접 관람한 경험이 없다고 답한 비율이 97.6%를 기록했다. 성별·연령별·학력별·소득별로 따져봐도 95% 이상이 관람한 적 없다고 답할 정도로 뮤지컬과 대중 간의 거리는 아득하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국내 뮤지컬이 성장을 이뤄낸 만큼 뮤지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도 적지 않은 편이다. 같은 통계에서 향후 관람하고 싶은 문화예술 행사를 묻자 12.6%가 뮤지컬을 지목했다. 이는 영화(64.4%)와 대중음악(19.0%)에 뒤이은 3위다.
‘뮤지컬 맛보기’ : 대중을 향한 매력 어필
대중의 관심을 현실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뮤지컬의 맛’을 더 많은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뮤지컬 시장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영국은 이미 이런 고민이 반영된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
뮤지컬 ‘물랑루즈’로 비교했을 때 한국은 좌석을 4개로 구분해 △VIP석 18만 원 △R석 15만 원 △S석 12만 원 △A석 9만 원으로 책정했다.
반면 영국은 좌석을 9개로 구분했다. 가격은 날짜별로 상이하나 가장 저렴한 날을 기준으로 33만 원에서 4만 원까지 분포돼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6개로 구분된 좌석에서 26만 원부터 7만 원까지 가격의 폭을 넓게 두고 선택을 소비자에게 맡기고 있다.
공연 기간도 티켓 가격에 영향을 준다. 공연을 한번 마련하려면 세트와 의상 등 여러가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연기간이 길수록 1회 공연 비용이 줄어들게되므로 티켓 가격도 내려갈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의 뮤지컬이 우리보다는 대체로 길다는 점도 티켓 가격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이 된다. 한국 뮤지컬의 공연 기간은 석 달 정도 진행되는 것에 비해 영국과 미국은 길면 1년, 짧아도 6개월 동안 공연을 지속한다.
영국과 미국은 가격과 날짜 선택의 폭을 넓혀 대중이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에 맞게 뮤지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몸집은 불었지만 갈 길은 먼 한국 뮤지컬 산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원종원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대여섯 달 정도 공연을 하는 쪽으로만 가더라도 가격이 훨씬 탄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장기 공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티켓 가격에 부담이 없도록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이 공연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원 교수는 “우리나라 뮤지컬 공연장은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에) 좋은 환경이라 보기 어렵다”며 뮤지컬 극장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브로드웨이는 1000석 남짓의 좌석으로 어디서 보더라도 만족스럽도록 구상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좌석에 따라서는 관람에 방해요소가 있어 관객에게 불편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과 영국·미국을 직접 비교할 수만은 없다. 당장 영국과 미국에서는 뮤지컬 활성화를 위한 법률이 마련돼있지만 우리는 이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인정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올해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는데, 이 개정법률안은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의 범위에 뮤지컬·게임 등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았다. 뮤지컬이 비로소 문화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것이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사단법인 한국뮤지컬협회와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는 성명에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을 통해 뮤지컬이 법령상 ‘문화예술’의 한 분류로 명기된 것을 크게 환영한다”면서 “특히 개정안에 게임과 애니메이션도 함께 들어가 있는 바, 두 장르는 개별 진흥법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감안할 때 뮤지컬산업 진흥법 제정에도 더욱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뮤지컬 산업이 매니아의 팬심에만 의존해온 측면이 컸으나 폭넓은 대중이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글로벌 산업으로 육성시키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지원과 관련제도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다.
원 교수는 “뮤지컬 산업의 장기적인 안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라며 “지금까지는 빠른 성장에 집중했다면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정책을 수립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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