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2.6º
미세먼지 좋음
강릉 15.2º
미세먼지 보통
)
새빨간 고기들이 걸려 있는 푸줏간을 돌아서니 마시장(馬市場)으로 통하는 길이 나타났다. 그 길목에 있는 어물전에는 소금을 잔뜩 뒤집어쓴 명태와 꽁치·꽃게·오징어 등이 널려 있었다. 온달은 명태의 공허한 눈을 보다가 문득 모친 생각이 났다. 어둠 속에 갇힌 후에도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왔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숙원을 이루는 것뿐이었다.
온달은 힘을 내어 걸음을 재촉했다.
마시장에 도착하니 말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저자에서 잔뼈가 굵은 온달이었기에 말을 사려면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알았다. 마침 저만치서 풍채가 좋고 얼굴이 둥글넓적한 사내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가 바로 온달이 찾던 마시장의 터줏대감 마총(馬總)이었다.
온달은 말 장수에게 좋은 말 한 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총은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저자에서 천하의 바보로 통하는 온달이 말을 사다니 개가 웃을 노릇이었다. 부자 마누라를 얻어 하루아침에 살림이 피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의 행색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마총은 온달을 우습게 보고 형편없는 말을 비싸게 팔기로 했다. 그는 재빨리 구석에서 말 한 마리를 끌고 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늙고 지저분한 말이었다.
“이 말이 이래 보여도 전장을 누비던 말이라네. 자네처럼 말을 처음 타는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야.”
온달은 말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말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제가 원하는 말은 아닙니다.”
마총은 온달이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꼼수를 쓰다가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제 처가 국마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마누라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팔불출이기까지 했다.
그 뒤로도 유심히 살폈지만 이 말 저 말 쫓아다니며 좋아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마총은 안심하고 국마 중에서 제일 비루먹은 말을 끌고 왔다. 지난번 궁성의 마방에 있는 친구가 병든 말을 처분한다고 할 때 혹시 소용이 있을까 하여 술값을 찔러 주고 받아 온 말이었다.
“이리 비루먹어 보여도 천 리를 한달음에 달리는 말이라네. 웬만하면 팔지 않으려 했는데 자네라서 특별히 내주는 걸세.”
말은 기골이 장대하지만 눈곱이 끼고 입에서 침이 흘렀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이 섞인 털이 듬성듬성 빠진 것이 영락없이 평강이 말했던 생김새였다.
온달이 다가가자 놀란 말이 앞발을 들고 길길이 날뛰었다. 한 걸음 물러나서 말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접근해서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온달은 말의 입을 벌리고 치열(齒列)을 살폈다. 나이가 세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발굽을 보니 편자가 떨어져 나간 데다 못이 발톱을 관통하여 너덜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 말고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아내가 일러준 조건과 들어맞았다. 그는 기뻐하며 당장 사겠다고 말했다.
마총은 속으로 온달을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막상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니 자꾸 망설여지는군.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자네와 약조했으니. 대신 값이나 후하게 쳐 주게.”
온달은 말 장수가 달라는 대로 셈을 치르고는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강은 온달이 끌고 온 말을 유심히 살피더니 크게 기뻐했다.
“잘하셨습니다. 이 말이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비루하고 병든 말로 보일 테지만 본색은 천 리를 달린다는 오추마(烏騅馬)입니다. 지금은 발을 다쳐서 윤기도 없고 지쳐 보이지만 치료하고 양생(養生)을 충실히 하면 곧 자태를 회복할 겁니다.”
이때부터 온달은 낮에는 말을 돌보고, 밤에는 아내에게서 예법과 학문을 배웠다. 낭군을 가르쳐 본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다가 흘러드는 강물을 받아들이듯 배운 것을 흡수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더는 가르칠 것이 없게 됐다.
병들었던 오추마는 온달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더니 어느새 완전히 기력을 회복했다. 기대한 대로 한나절에 5백 리는 거뜬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빠르고 힘이 넘쳤다.
온달의 말 타는 솜씨도 일취월장했다. 오추마를 타고 달리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온달을 가르치는 데 버거움을 느낀 평강은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믿고 맡길 만한 스승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온달의 집으로 한 노승이 찾아왔다. 길고 하얗게 센 눈썹이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는 객승(客僧)이온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인은 안주인으로부터 손님이 찾아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손히 대접하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노승을 반갑게 맞이하여 사랑채로 안내했다.
노승은 방으로 들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분명 큰 인물이 일어날 형세로다.”
하인은 그 말을 귀담아듣고 공주에게 가서 아뢰었다.
“지금 객방에 스님 한 분이 드셨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강은 하인에게서 노승의 언행을 소상히 듣고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공주는 옷차림을 바로 하고 노승이 묵고 있는 사랑채로 건너갔다.
침상에 앉아서 참선하고 있던 스님은 안주인이 방문하자 합장으로 맞이했다.
“원로에 피곤하실 텐데 편히 쉬십시오. 곧 저녁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는 아랫단에 물결무늬 자수를 곁들인 붉은 비단 저고리에 색색 천을 이어 붙인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뺨에는 홍화씨 가루를 살짝 발라 품위를 한층 돋보이도록 했다. 그녀의 복장은 노승의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있는 낡은 승복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노승은 평강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매우 놀라며 급히 절을 했다.
당황한 공주는 황급히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
“어찌 이리 과분한 예를 취하십니까?”
“소승, 공주님께 문안 여쭙니다.”
평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면부지의 승려가 어찌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공주라니요.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소승의 법명은 자운(慈雲)이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법 이외에도 역법과 천문을 익혀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 공주님은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상이 분명한데 어찌 저를 속이려 하십니까.”
평강은 더는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결국 자운의 혜안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자운은 공주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견식이 어찌나 해박한지 어둠이 내리도록 얘기가 계속됐다.
공주는 자운이야말로 온달을 이끌어 줄 스승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은근히 청했다.
“이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제 남편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 주십시오.”
자운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것도 인연인 듯합니다.”
공주는 자운의 거처를 별채로 옮기고, 하인을 붙여서 매사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이때부터 자운은 온달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치게 됐다. 첫 만남에서 자운은 온달의 비범한 기상을 간파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가르치는 자에게 있어 뛰어난 제자를 기르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다고 했다. 온달은 스승의 가르침을 자양분 삼아 하늘을 떠받칠 만큼 크고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자운은 제자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는 엄한 스승이었지만, 평소에는 마치 아버지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는 풍상(風霜)을 많이 겪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제자를 바라볼 때면 가끔 눈가에 진한 애상이 묻어났다. 온달은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온달은 칼을 들면 당해낼 적수가 없었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면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우주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다. 치세에 대한 안목과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 그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책을 탐구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그는 누가 봐도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 되었다.
자운은 몰라보게 성장한 온달의 모습을 보며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자운은 온달을 데리고 평소 무예를 연마하던 숲으로 갔다.
온달은 스승의 침울한 얼굴을 보고 걱정이 됐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요? 일깨워 주십시오.”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겐 아무 잘못이 없다. 모든 잘못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
자운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조용히 떠나려 했으나 너에게 이 말은 꼭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이리 불렀다.”
온달은 스승의 번민하는 표정 앞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내 속명은 하유개(荷有改)라 한다. 지난날 박작성의 성주였고 네 아버지의 의형이기도 했다.”
자운은 그동안 숨겨 온 비밀을 털어놓았다.
온영의 도움으로 전장에서 도망친 하유개는 머나먼 요동성까지 달아났다. 진압군은 집요하게 그를 뒤쫓았다.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승려로 행세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오랜 시간 도를 닦다 보니 그의 내면에는 진심으로 불심(佛心)이 생겨났다. 하유개는 비로소 속세의 증오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속까지 털어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바로 자신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당하고 목숨마저 잃은 온영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하유개는 온영이 비장한 얼굴로 자신에게 길을 열어 주던 순간이 자꾸 떠올라 불법에 정진(精進)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온영의 아들인 온달의 집을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