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 각국이 날로 상승해 당할 수 없이 부강해지는 것이 어찌 다른 데 원인이 있겠는가? 이치에 맞는 학문에 종사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며 정밀한 지식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기묘한 기계가 날이 갈수록 더 새로운 것이 나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이보다 앞서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나라 인재가 외국보다 크게 못한 것이 아니며 다만 일상적 교육이 없기 때문에 인민의 식견이 열리지 못하고 농·상공업이 흥기하지 못하여 백성의 생업이 날로 영락하고 국가재정이 날로 궁해 가고 있다. 그러나 신설된 학교는 겨우 형식을 갖추는 데 그치고 교육의 방도에는 전혀 어두워 5·6년 동안 조금도 진전된 성과가 없다. 상공학교에 있어서는 더욱 급선무가 되니 일찍이 지난해 명령을 내렸으나 아직도 개설 논의가 없다. 이와 같이 질질 끌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할 노릇이다.”
광무 황제의 이러한 절실함에 힘입어 상공학교(1899-1900), 광무(鑛務)학교(1900), 모범잠업소·공업전습소 등 실업교육기관(1902), 법률학교(1900), 영어·일어·법어학교 등 외국어학교, 무관학교 등이 설치되었다.
상공학교가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상공학교를 더욱 급선무로 여기는 광무 황제의 뜻이 있었고 황제와 황실에 충직한 보부상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1899년 5월 새로이 조직된 ‘상무사(商務社)’의 전국 보부상과 서울 육의전 상인들은 상사(商社) 설립과 근대적 제조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광무 황제의 조칙에 즉각 호응했다. 상무사는 신기계의 제조와 수입을 권장했다. 새로운 물품을 제조한 자에게는 특허전매권을 부여했다. 제지·직조 회사 설립을 권장하여 기선·기차에 이르기까지 설치를 장려했다. 상공인 육성에 대한 보부상들의 포부는 상무사가 설립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00년 2월 기존의 ‘광성학교’를 개명하고 교과과정을 상업학 전문으로 개편해 사립 ‘광성상업학교’로 전환하여 학생모집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학생 수가 30명에 불과했으나 1904년 초에는 수백 명에 달했고, 교사가 비좁아 입학하려고 몰려드는 지원자를 다 수용하지 못하고 물리칠 지경이었다. 관립 상공학교는 1900년 11월 초 ‘광무학교’와 같이 개설됐다.
광무 황제가 1899년 4월 학문·교육 개혁 독촉 조칙을 통해 근대화 개혁을 서두른 것은 대한제국의 급선무인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설치된 수많은 근대적 각급 학교를 통해 실무 관료들을 대량으로 신속히 배출했다. 신식교육에는 신분 상승을 갈망하는 백성들이 크게 호응했다. 대한제국 시기 중·하위관리들의 교육 배경은 대신급 고위관리들에 비해 근대적이었다. 광무 황제는 1898년 8월 각급 학교 졸업자와 외국 유학 출신자에 대한 관직 수여 조치 및 1900년 10월 외국어학교·의학교·중학교 졸업자에 대한 관직 수여 조치를 통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관직에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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