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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대인 웅길산(熊吉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연개소문은 제 아비 연태조보다 더한 놈이요. 그자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한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을 거요. 아무래도 폐하의 재가를 받아 제거해야겠소.”
북부대인이 물었다.
“폐하께 재가를 받는 건 어렵지 않으나 세력이 강성한 그자를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이오?”
“요동에 장성을 쌓는 공사의 진척 속도가 너무 느리다 하오. 이를 핑계로 연개소문을 공사 총책임자로 임명해 요동으로 보내는 거요. 그리되면 그는 자연히 고립될 수밖에 없소. 그때 연씨 일족에게 모반의 죄를 씌워 처단합시다.”
모인 사람들은 서부대인의 묘책에 감탄했다.
결의를 한 이들은 우르르 어전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국왕을 알현한 후 경당 조직의 폐해를 고하고 연개소문을 제거해야 한다고 속닥였다.
이때쯤 영류왕도 경당 재건을 연개소문에게 맡긴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국왕은 두말하지 않고 대신들의 청을 들어줬다.
며칠 후,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불러 요동에 가서 천리장성의 역사를 독려하라고 명했다. 동부대인은 자신이 가야 하는 이유를 묻고자 했지만 영류왕은 교지만 내리고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는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연개소문은 문득 며칠 전 친분이 있는 시위로부터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대당 주화파 대신들이 예정도 없이 국왕을 알현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요동 행의 배후에는 그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모든 상황이 분명해지자 연개소문은 이를 북북 갈며 자신의 부중으로 돌아갔다.
이날 저녁,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의 감독을 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당 주화파 대신들은 북부대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들은 기분 좋게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다음 일을 의논했다.
이때 이 집 하인 하나가 동부대인의 계집종을 꼬드겨 안채 후원까지 데리고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은 뜰과 연못을 구경하면서 시시덕거렸다. 소피를 보러 나왔다가 이 광경을 본 북부대인은 하인을 불러 심하게 야단쳤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하인은 지금 집 안에서 연개소문 일족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계집종에게 말해 버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주인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다.
연개소문은 국왕과 대신들의 흉계에 치를 떨었다. 그는 당장 책사 도수금을 불렀다.
동부대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도수금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선수를 쳐야 합니다. 먼저 거사를 일으켜서 저들을 쓸어버려야 합니다.”
“좋은 수가 있겠소?”
“일단 왕명을 따르는 척하십시오. 한 달 후 요동으로 떠나는 날 출정식을 한다고 국왕과 대신들을 초대하면 의심하지 않고 참석할 겁니다. 그때 요동으로 차출된 군사들을 움직여 저들을 해치우면 됩니다.”
“대신들의 가병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합세하여 덤비면 낭패가 아니오?”
“머리를 자르면 몸통은 자연히 고꾸라지기 마련입니다. 자기 주인이 죽었다는 걸 알면 순순히 투항할 겁니다. 게다가 평양성의 수비대는 이미 주군의 심복들로 채워지지 않았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개소문이 다시 물었다.
“막상 거사를 일으키면 요동 지역의 성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국내성 일대의 귀족들은 어찌 나올지 모르겠소.”
도수금은 신중하게 대답한다.
“대당 주화파는 대부분 장수왕 시절에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주도한 세력의 후손입니다. 그런 까닭에 국내성 쪽과는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다만, 오골성을 비롯한 압록수 하구에 자리한 성들이 걱정입니다. 그곳의 성주들은 진작부터 건무에게 충성을 바쳤던 자들이니 이번 거사에 반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먼저 이 지역 경당에 나가 있는 장수들에게 파발을 띄워 거사의 정당성을 알리고 성주들을 포섭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만 거사에 동의한다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건무를 몰아낸 후에는 누구를 국왕으로 삼는 게 좋겠소?”
“건무의 동생인 대양(大陽)의 아들 보장(寶藏)이 적합합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데다 기상이 남달라 국왕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보장이라면 임금의 그릇이라 할 수 있소. 그리 결정합시다.”
이날 연개소문과 도수금은 밤을 하얗게 새우며 거사를 모의했다.
서력 642년 9월 어느 날, 평양성 광장에서는 대규모 출정식이 거행됐다. 뿔피리 소리를 시작으로 취타대가 연주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전신에 붉은 갑주를 걸치고 머리에는 황금빛 투구를 쓴 평양 수비대 소속 철기병 1000명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했다. 이를 지켜보던 군신들은 모두 가슴이 뭉클해졌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기마행렬이 끝나자 행장을 차려입은 3000여 명의 장정이 질서정연하게 식장으로 입장했다. 장성 축조를 지원하기 위해 차출된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광장을 한 바퀴 돈 후에 각기 정해진 자리에 가서 섰다. 이어서 북이 크게 한 번 울리자 모든 인원은 차렷 자세를 취했다.
연개소문은 단상에 있는 영류왕을 향해 몸을 돌린 후 허리를 숙여 군례를 취했다.
“신 연개소문, 폐하의 명을 받들어 요동 장성 축조 현장으로 떠납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 온 자가 마침내 떠난다니 왕과 대신들은 앓던 이가 빠진 듯 기뻤다.
영류왕은 내심을 감추기 위해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무사히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라. 내 그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
행사가 끝나자 영류왕은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며 일렀다.
“요동으로 떠나는 군사들을 위한 연회를 마련했다 하니 모두 남아서 격려해 주도록 하라.”
말을 마친 영류왕은 식장을 나와 궁으로 돌아갔다.
미리 준비해 놓은 엄청난 양의 음식과 술이 출정식장 주위에 설치한 천막으로 운반됐다. 곧이어 들려오는 악공들의 거문고 연주와 노랫가락에 대신들은 흥겨워하며 술을 마셨다. 두서너 순배 술잔이 돌아가자 그들은 긴장을 풀고 떠들어댔다. 이때 미리 명을 받은 군사들이 대당 주화파 대신들 뒤로 가서 섰다.
대신들 사이를 오가며 술을 권하던 연개소문이 들었던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술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참석한 대신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쳐다봤다.
연개소문은 칼을 빼 들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동명성왕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후로 선왕이신 영양왕 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구려는 조선의 고토 회복을 위해 하루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광개토태왕 대에는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혀 사방 육천 리가 넘었고, 영양왕 대에는 수나라의 대군에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수나라 포로 1만 명을 아무 대가 없이 돌려보내더니 그것도 모자라 타국의 관리에게 우리 강산을 전부 드러내 보였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고구려인이 피땀 흘려 이룬 고수 전쟁 승리의 상징인 경관을 파괴한 것이다. 이 모두가 당나라에 저자세인 비굴한 조정의 대신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 장병이여, 저 당나라 개만도 못한 대신들을 참하고 위대한 고구려를 바로 세우자!”
동부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신들의 뒤에 서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휘둘렀다. 대신들은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때 죽은 대당 주화파의 수가 무려 150여 명에 이르렀다.
대신들을 처단한 연개소문은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궁으로 달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영류왕은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연개소문의 편으로 돌아선 평양 수비대가 이미 궁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영류왕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연개소문이 칼을 들고 들이닥쳤다.
“당신은 비겁했소. 그래서야 어찌 동명성왕의 후손이라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된 마당에 구차하게 살아서 뭐 하겠소. 순순히 칼을 받으시오.”
영류왕은 모든 것을 체념했다.
“짐이 승냥이 새끼를 키웠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날이 왕의 가슴을 찔렀다.
왕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군사들을 이끌고 잔당 토벌에 나섰다. 수백의 금위군이 끝까지 맞서 싸웠지만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반란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이 궁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비보를 들은 몇몇 대신의 가병이 산발적으로 저항했지만 평양 수비대의 막강한 무력 앞에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했다. 이렇게 해서 반정은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연개소문은 도수금과 함께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을 찾아갔다. 그는 공손히 예를 갖추고 말했다.
“겁쟁이 건무는 이미 죽었습니다. 저와 함께 궁으로 가셔서 왕좌에 오르십시오.”
보장은 갓 이십 대에 들어선 수려한 용모의 귀공자였다. 그는 한동안 연개소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를 왕으로 예우하고 명령에 따를 수 있겠소?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나 가 보시오. 나는 허수아비가 되기는 싫소.”
보장의 당찬 태도에 연개소문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나라를 위해 거사를 일으켰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모든 고구려 백성이 동명성왕의 뒤를 이을 영민하고 담대한 임금을 원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 받아들이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보장은 심사숙고 끝에 왕위 계승을 수락했다. 이 사람이 바로 고구려 제28대 임금인 보장왕(寶藏王)이다.
거사 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大莫離支)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민심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목적으로 경미한 죄를 지은 죄수를 사면하고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줬다. 그리고 보장왕과 상의한 끝에 건무의 시신을 거둬 후히 장사 지내고 자손들에게는 기름진 땅을 내려 편히 살 수 있게 했다. 또한 대당 주화파 중 핵심 인물 몇몇을 제외한 이들의 자손에게는 재산과 직위를 그대로 계승하게 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자 이번 거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귀족들도 새로운 조정을 따르게 됐다. 흉흉했던 민심도 차츰 가라앉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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