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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개혁정치를 계속해 나가면서 당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서 당 태종의 근황을 살폈다.
이때 당 태종은 별궁인 양성궁(襄城宮)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별궁의 축조를 위해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렸다. 동원된 인력만도 연 2백만 명이 넘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의 정변을 틈타 침략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서자 속내를 숨기고 영류왕을 애도하는 조문사(弔問使)를 파견했다.
김춘추에게서 고구려와의 협상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선덕여왕은 궁여지책으로 왜지에 사신을 보냈다. 이 무렵 왜국에서는 새로운 임금이 즉위했는데, 바로 황극왕(皇極王)이었다.
신라 사신은 풍랑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왜 땅에 도착했다. 융숭한 대접을 기대하고 궁으로 찾아갔지만 누구도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사신이 선덕여왕의 뜻을 전하고 협력을 요청했지만 황극왕은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백제에서 이미 손을 쓴 모양이었다.
왜에 갔던 사신마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절박한 심정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 태종 앞에 나선 신라 사신은 공손히 국서를 바쳤다. 국서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수시로 쳐서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우니 군사를 내어 도와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종이 국서를 읽고 물었다.
“군사를 내어줄 수는 있다만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이냐?”
막상 구체적으로 물어 오니 대답할 말이 궁했다.
사신은 얼굴을 붉혔다.
“대국이 지원만 해 주신다면야 고구려와 백제쯤이야 손쉽게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 태종은 혀를 찼다.
“피아(彼我)의 기량을 자세히 살피고 그에 맞는 계책을 세우는 것이 모든 싸움의 기본이다. 이런 기본도 제대로 다지지 않고 어찌 승리하기를 바라겠느냐.”
사신은 송구하다는 듯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당 태종은 오만한 태도로 방책을 제시했다.
“짐이 거란족을 포함한 변경의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가면 고구려는 주력군을 그쪽으로 옮길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한동안은 평화로울 수 있다. 그래도 쳐들어온다면 당나라 군복과 깃발 수천 개를 주겠다. 신라 군사가 우리 군복을 입는다면 고구려군과 백제군은 당군이 온 줄 알고 놀라서 도망칠 것이다. 이도 저도 먹히지 않는다면 우리 왕족 중 한 사람을 골라 너희 나라에 보내겠다. 신라의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업신여기고 자꾸 침범하는 듯하니 그를 왕으로 삼아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워라.”
사신은 말 같지 않은 소리에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의 용렬함을 한탄하며 그를 신라로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당 태종은 조선어에 능통한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에 파견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고자 했다. 당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개소문은 보란 듯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북변을 치고 2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이는 당나라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평양성에 도착한 후에도 당사(唐使)는 하릴없이 객관에 머물러야 했다. 보장왕이 알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사신 길들이기였다. 당 사신 현장은 며칠 후에야 겨우 면담을 허락받고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장이 궁궐 안 조그만 방으로 인도되어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철겅철겅 갑옷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체격의 장군이 나타났다. 그는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아름다웠으며 수염이 길었다. 허리에는 패검 다섯 자루를 차고 있는데 그 위용이 자못 대단했다. 사신은 한눈에 그가 연개소문임을 알아보고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연개소문이 그만 됐으니 좌정하라고 눈짓했다.
현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자에 앉았다.
연개소문이 위엄 있게 말문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소. 그래, 용건이 무엇이오?”
기에 눌린 사신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우리 폐하께서 내리신 국서를 갖고 왔습니다.”
“그 내용이 뭐요?”
국왕보다 먼저 국서를 읽을 수는 없었기에 내용을 묻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사냥감을 노리는 호랑이와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신의 입에서 얘기가 흘러나왔다.
“신라는 당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나라이니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막리지는 순간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천하에 속한 나라요. 그런데 종주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그 땅을 빼앗았소. 그러고는 아직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소. 작년에는 왕족인 김춘추가 이곳에 와서 그 땅을 돌려주겠다고 서약서까지 쓰고 돌아갔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오. 그러니 저들을 어찌 가만두고 볼 수 있겠소. 이것은 우리의 일이니 당나라야말로 나서지 마시오.”
현장은 연개소문의 일갈에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용기를 내서 반론을 폈다.
“그건 이미 지난 일입니다.”
“과거가 있으니 현재도 있는 거요.”
“그렇게 따지면 옛날 한(漢)나라가 요동에 사군을 설치한 적이 있으니 한의 뒤를 이은 당나라가 그 땅을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사의 반박을 듣고 연개소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요동과 요서는 우리 고구려의 전신인 조선이 3000년 동안 통치하던 땅이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사실인데 네 어찌 기만하려 드느냐!”
천둥 같은 호통에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이 흔들렸다.
현장은 내친김에 세게 나가기로 했다.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내가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으냐. 가서 당주(唐主)에게 전해라. 올 거면 어서 오라고. 내 그자를 죽여 패수(浿水)에 장사 지내 주겠다.”
사신은 상대가 뿜어 내는 살기에 극도의 위협감을 느꼈다. 그는 보장왕을 알현하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장안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장안으로 돌아온 현장은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이에 태종은 당장 고구려를 치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태종의 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아뢰었다.
“이럴 때일수록 명분이 중요합니다. 현장이 고구려 왕을 만나지 못하고 왔다 하니 다시 사신을 보내서 최후통첩을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장손무기는 태종의 처남으로 현무문의 변란을 함께 공모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공신이었다. 그는 공을 인정받아 승상과 비슷한 자리인 사도(司徒)를 역임하고 있었다.
태종이 간언을 받아들여 다시 사신을 보내고자 했으나 지원자가 없었다. 평양에 갔다가 공연히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엄(蔣儼)이라는 자가 나서서 고구려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당 태종은 흔쾌히 그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평양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현장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장엄이 더 용감했을 뿐이었다. 그는 연개소문과 신라 문제를 의논하다가 점차 언성이 높아졌다. 장엄은 할 말이 궁색했지만 당나라를 대표하는 처지였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장엄은 자신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끄집어냈다.
“그럼 공은 어째서 영류왕을 시해했소? 그것은 불충(不忠)이 아니오!”
연개소문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격하게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게 보였다.
“내가 불충한 자라면 당주 이세민은 어떻소? 주군인 수양제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핏줄인 형제들을 참살하고, 부친을 이궁에 유폐시키지 않았소. 불충에 더해 불효한 자를 떠받들고 있는 그대는 얼마나 떳떳하오? 나에게 한 것처럼 그대의 주군을 욕할 수 있다면 여기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요!”
장엄은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개소문의 말이 맞았다. 그렇다 해서 주군을 욕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연개소문은 좌우에 명해서 사신을 토굴에 감금시켰다.
사신이 고구려에서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
태종은 당장 회의를 소집하여 고구려를 칠 일을 의논했다.
“연개소문이 일전에는 짐의 사신을 학대하더니 이제는 가두기까지 한다. 이런 모욕을 더는 참을 수 없소. 당장 고구려를 정벌하겠소. 여러 대신의 의견은 어떠하오?”
간의대부 저수량(褚遂良)이 나서서 말렸다.
“우리 군사가 요하를 건너가서 승리할 수 있다면 진실로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뜻대로 되지 않아 패하기라도 한다면 나라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겁니다. 수나라의 교훈을 떠올리십시오.”
병부상서 이세적(李世勣)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날 설연타(薛延陀)가 우리의 변방을 약탈하고 돌아갈 때 폐하께서는 군사를 보내 추격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징이 간곡히 말리는 통에 그만두셨습니다. 만약 그때 설연타의 군대를 쫓아가서 섬멸했다면 훗날의 소요도 없었을 겁니다.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뜻을 세우셨다면 절대 꺾지 마십시오.”
당 태종은 이세적의 말을 흡족하게 여겼다.
이번에는 상서좌복야 방현령(房玄齡)이 나섰다.
“겨우 내란을 종식시키고 이제야 안정을 찾았는데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소서.”
어사대부 장량(張亮)도 반열에서 나와 거들었다.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너무 큰 부담입니다. 제발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신하 대부분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다.
태종은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선언했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소. 숙고한 결과, 짐은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소. 그리 알고 원정 준비를 철저히 해 주기 바라오.”
이로써 당나라는 전쟁 준비 체제로 들어갔다. 이때가 서력 644년 2월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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