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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은 득의만만했다. 육군과 접선할 거점을 마련해 두었으니 이제 마음 높고 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고구려 해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행군총관 구효충(丘孝忠)을 장산 군도로 보냈다. 만약 그들의 방비 태세가 형편없다면 곧장 패수구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구효충은 1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장산 군도로 항행했다. 순풍을 받아 대장 군도를 지나니 저 멀리 석성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사성에서 이곳까지 항해하는 동안 고구려 선박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석성도에서 5리쯤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니 마침내 고구려 전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20~30명을 태울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선박이 50여 척쯤 해상에 떠 있었다.
구효충은 고구려 선단을 얕잡아 보았다.
“일시에 에워싸서 공격을 퍼부어라!”
대장선의 고장(鼓長)이 진격의 북을 울렸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당선들이 일제히 항진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커다란 당나라 전함이 고구려의 함선 주위로 몰려들었다.
석조는 계획대로 달아나는 척하면서 암초 지대로 당선을 유인했다. 당나라 배들은 함정인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추격했다. 어느덧 당군의 배들이 암초대로 접어들었다. 이때 돌섬 뒤에 숨어 있던 100여 척의 고구려 전선이 일제히 북을 울리면서 섬 그림자를 빠져나왔다.
아연실색한 구효충은 황급히 배를 돌리려 했지만 암초에 가로막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몇 척의 배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된 상태였다.
고구려 전함들은 북과 징을 울리면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 갔다. 적선의 군사들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서자 대장선에서 효시가 날았다. 이를 신호로 고구려 전선에서 일제히 불화살이 날아올라 당선을 덮쳤다. 당군이 바닷물을 퍼올려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살기 위해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드는 군사가 잇따랐다.
불타는 배에서 치솟은 화염이 하늘을 찔렀다. 구효충의 대장선을 비롯한 선박 대부분이 사나운 불길에 휩싸여 차례로 침몰했다.
이날 석성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수전에서 행군 총관 구효충을 포함해 1만여 명의 당군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됐다. 단지 10여 척만 간신히 도망쳐 비사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해군의 눈부신 대승이었다.
한편, 당 태종이 이끄는 본대는 영주를 거쳐 요택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통정진이 아닌 회원진을 거쳐 요하로 나아갈 계획이었다.
요택은 무려 2백 리가 넘게 진흙밭이 펼쳐져 있는 지대로 사람과 말이 통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험한 요택도 태종의 야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장작대장 염입덕(閻入德)에게 명해 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게 했다. 명을 받은 염입덕은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를 베고 마른 흙과 돌을 날라 수렁을 메우고 길을 닦았다. 모든 군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작업한 덕분에 당군은 열흘 만에 무사히 요하 서안에 닿을 수 있었다.
태종이 요하 서편에 당도하니 건안성에 패하고 물러나 있던 장검이 달려와 부복했다.
“소장이 불민하여 폐하의 명성에 먹칠했습니다. 패군지장(敗軍之將)을 벌하소서.”
태종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분노를 거두고 근엄하게 일렀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전쟁 중에 장수를 죽이는 것은 적이 좋아할 일이니 참겠다. 너는 당장 영주로 돌아가 수시로 공격해 오는 적으로부터 보급로를 지켜라. 만일 그 일로 공을 세운다면 지난날의 죄과는 묻지 않겠다.”
장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재빨리 영주로 떠났다.
태종은 강변으로 나아가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요하를 바라봤다.
장검이 축조해 놓은 부교가 눈에 들어왔다.
태종은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 다리만 건너면 요동성이 보이겠구나.”
두려움과 함께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당 태종의 머리 위로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너 요하 동안에 도착한 당 태종은 부교를 불태우라고 명했다. 이는 요동을 정벌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수하 장졸들에게 내비친 것이었다.
당 태종은 영접 나온 이세적의 호위를 받으며 요동성 앞으로 나아갔다. 대총관은 그간의 전황을 낱낱이 아뢰었다. 태종은 장군예의 실수로 많은 군사를 잃었다는 대목에서 크게 화를 냈다. 그는 군법에 따라 장군예를 참수하고 몸소 기병을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요동성으로 진군했다.
본대가 합류하자 당군의 요동성 공격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요동성주 임석황은 성루 위에서 적군의 형세를 살폈다. 까맣게 밀려드는 당군의 물결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껏 개량된 당군의 포차는 수나라의 그것과 달리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요동성은 평지성이어서 황소만 한 바윗덩어리를 날리는 고성능의 포차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성주는 부장 송악을 돌아보며 무척 걱정했다.
“당주의 군대가 합류하니 도적들의 형세가 자못 대단하구나. 특히 저들의 포차는 규모가 크고 강건해 보인다. 아무래도 저 포차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느냐가 이번 전투의 관건이 되겠구나.”
“전력을 기울여 기필코 막겠습니다.”
송악이 처절하게 대답했다.
요동성 앞에 포차를 설치한 당군은 이세적의 지시가 떨어지자 3백 근이나 되는 바위를 성벽을 향해 날렸다. 한두 번의 타격은 견뎌 냈지만 공격이 계속되면서 성벽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군사들이 서둘러 나서서 붕괴한 성벽에 목책을 덧대어 막았다.
한참 바위를 날리던 당군은 요동성의 성벽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자 포차 공격을 멈추고 성으로 진격해 갔다. 성벽 위의 고구려군은 쇠뇌로 맞섰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고구려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적지 않은 희생을 내고 물러갔다.
다음 날, 전열을 정비한 당군은 아침부터 바위를 날라 포차 주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이세적은 비장한 얼굴로 군사들에게 호령했다.
“지금부터 쉬지 말고 바위를 날려라. 여기 있는 바윗덩이를 전부 쏘아 올린 다음 운제를 앞세워 성벽으로 돌진할 것이다. 오늘은 기필코 요동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드디어 당군이 포차를 써서 바위를 날리기 시작했다. 성안의 고구려 군사들은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바위 때문에 운신조차 어려웠다. 포차 공격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됐다. 요동성은 돌로 쌓아 올린 석성(石城)이기에 석공에 약했다. 줄기찬 포탄 공격에 성벽 곳곳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드디어 이세적에게서 총진격의 명이 떨어졌다.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한 당군은 운제를 앞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진격하던 당나라 군사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가까스로 성벽 아래까지 진출하자 이번에는 끓는 물과 바위가 쏟아졌다. 돌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당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맞서 싸우는 고구려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치열한 공방전은 여러 날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전투가 길어지자 답답해진 당 태종은 이세적을 불렀다.
“우리 군사들이 용감하게 싸우고는 있지만 요동성 공략이 그리 쉽지가 않구나.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피해만 늘어날 것이다.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
“며칠만 더 밀어붙이면 요동성은 함락될 겁니다. 벌써 성벽 여러 군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대총관이 장담했지만 당 태종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 측 사상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미 1만의 가까운 군사가 죽거나 다쳤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희생될지 모르지 않느냐.”
이세적으로서는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폐하께 묘안이 있으신 겁니까?”
태종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내가 기상을 보건대 내일 남풍이 거세게 불 것이다. 그러니 운제를 끌고 성의 서남쪽으로 나아가라. 그것을 성벽에 가까이 붙인 후 타고 올라가 성안으로 불화살을 쏴라. 건물에 불길이 번지면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틈에 성벽을 넘으면 확실히 점령할 수 있다.
화공을 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되면 애꿎은 백성도 불에 타 죽을 수 있었다.
이세적은 마땅찮았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은지라 말릴 수 없었다.
당 태종의 막사에서 물러 나온 이세적은 수하 장수들을 불러 화공을 준비시켰다.
다음 날 아침, 이세적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성의 서남쪽으로 데리고 갔다.
“성 가까이 다가가서 안쪽으로 불화살을 쏴라. 오늘은 남풍이 부니 화공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번에는 기필코 요동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자, 가자!”
이세적이 선봉에 서자 사기가 고취된 당나라 군사들은 운제를 앞세우고 성으로 접근해 갔다. 성벽 위에서 끊임없이 시석을 날렸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당나라 군사들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천 개의 불화살이 일제히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무너진 성벽을 보수한 목책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성벽 주변의 건물도 하나둘씩 불타올랐다. 바람을 등에 업은 불길은 삽시간에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성주는 급히 군사를 시켜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이 너무 거세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요동성의 군민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당군은 모래주머니로 해자를 메우고 운제를 설치하더니 재빨리 성벽을 넘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무너진 성벽 사이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군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군이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요동성은 결국 함락되고야 말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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