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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골성에 지휘 본부를 설치한 연개소문에게 요동성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군사 도수금과 각 부 욕살·여러 성의 성주를 긴급히 소집해 회의를 했다. 이때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온 군사 15만 명이 오골성에 모여 있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동성이 함락되고 성주 임석황은 장렬히 전사했다 하오. 게다가 우리가 믿었던 천혜의 요새인 백암성도 더러운 배신자 때문에 도적의 손에 넘어갔소. 당군은 이제 곧 천산산맥의 궁장령을 넘어올 것이오. 어찌 대처하면 좋겠소?”
대로 고정의가 나섰다. 그는 모든 장수가 존경하는 백전노장으로 지략이 출중했다. 그래서 연개소문도 항상 그의 의견을 귀담아들었다.
“궁장령은 군사 1백 명만 있어도 수만의 적을 막아낼 수 있는 험준한 고개입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병력을 증강하는 등 방비를 철저히 해 두었습니다. 당군이 제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은 분명히 안시성을 먼저 친 후에 편령(偏嶺)을 넘으려 할 것입니다.”
책사인 도수금의 생각은 달랐다.
“당주 이세민은 전략가입니다. 더구나 장손무기와 같은 모사가 옆에서 보필하고 있습니다. 신성과 건안성 등 요동 일대에 주둔한 아군의 수효가 20만을 헤아리는데 이를 뒤에 두고 무모하게 평양으로 진격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성미 급한 고연수가 대막리지를 쳐다봤다.
“어쨌든 간에 도적들의 다음 목표가 안시성일 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지원군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정의가 말을 받았다.
“당주 이세민은 궁장령을 넘지 않고 안시성과 건안성을 공격할 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요동에 몰아넣고 지구전을 펼쳐야 합니다. 벌써 5월 말입니다. 곧 장마가 닥칠 테니 시간을 끌면서 저들의 보급을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이미 임유관에서 요하에 이르는 길은 우리 유격대가 장악하다시피 했습니다. 당군이 요동성을 점령하면서 많은 양의 군량을 획득했다지만 대군을 얼마나 먹일 수 있겠습니까. 식량 보급이 끊기면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 해도 오래 버틸 수는 없습니다.”
연개소문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정의 장군 말씀이 맞소. 당군을 함정으로 몰아넣어야 하오. 북으로는 안시성, 남으로는 건안성, 동으로는 천산산맥, 그리고 서로는 요하가 흐르는 그곳이야말로 당주의 발을 묶어 놓기에 적합한 곳이오. 그곳에 가두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거요. 시간은 우리 편이니 충분히 승산이 있소.”
대막리지는 도수금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사성에 있는 당나라 해군은 어찌하고 있는가?”
“온사문 장군이 장량 휘하의 구효충이 이끄는 군사를 대거 수장시켰습니다. 이제 그들도 함부로 진격하기는 어려워졌으니 건안성으로 이동해 당주가 이끄는 본대와 합류하려 할 겁니다.”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의가 군사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건안성주 기동부는 을지문덕 대장군의 수제자입니다. 장량 정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연개소문은 모든 작전을 꼼꼼히 짚은 후에 마침내 명을 내렸다.
“누성달(婁成逹) 장군은 말갈 군사 3만을 이끌고 궁장령으로 가시오. 그곳을 막으면 저들은 어쩔 수 없이 남하하여 안시성으로 향할 것이오. 당주가 군사를 물리면 누 장군은 궁장령에 군사 일부를 남기고 곧바로 안시성으로 내려와 고정의 장군과 합류하시오. 대로께서는 고연수·고혜진 두 장군과 함께 편령을 넘어 안시성을 구원하십시오.”
대막리지는 시선을 돌려 도수금에게 명했다.
“그대는 당장 석성도로 가서 온사문 장군을 만나시오. 그에게 당나라 해군이 건안성을 치기 위해 움직이면 전함을 이끌고 비사성 앞바다로 나아가서 제해권을 장악하라 전하시오.”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와 빠짐없이 눈을 맞추며 당부했다.
“우리의 과제는 당군을 천산산맥 이서(以西)에 묶어 두는 것이오. 그러니 유격 전술을 펼치면서 시간을 끄시오. 용맹만 믿고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오.”
장수들은 반짝이는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로 무언의 다짐을 했다.
당 태종의 군대가 궁장령에 다다랐다. 그들은 고개를 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루에도 몇 차례 군사들을 올려 보냈지만 워낙 지형이 험준한 데다가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막대한 희생만 치르고 물러나야 했다.
당 태종은 장수들과 함께 머리를 싸매고 궁장령을 점령할 방법을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공방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동부 욕살 누성달이 이끄는 군대가 궁장령에 당도했다. 이들 덕분에 고구려의 궁장령 방어 태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궁장령을 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까지도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누성달의 부대까지 합세했으니 승산이 없었다.
결심을 굳힌 당태종은 수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군사를 돌려 요동성으로 돌아간다.”
이세적이 나서서 간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궁장령을 넘어야 합니다.”
태종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다스렸다.
“이대로는 우리 군사의 희생만 늘어날 것이다. 차라리 요동성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 후에 안시성을 함락시키고 편령으로 넘어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
원정에 나선 군대라면 무엇보다 속전속결이 중요했다. 대총관은 요동성으로 돌아가는 건 시간 낭비라 여겼다. 하지만 주군이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반대해 봐야 소용없었다.
이렇게 해서 당군은 요동성으로 물러났다.
요동성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장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의 작전을 의논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세를 바꾸기 위해서는 남쪽의 안시성과 건안성을 평정한 후에 편령이나 청석령을 넘어야 한다. 우선 안시성부터 치기로 하자.”
모사로 유명한 장손무기가 반대하고 나섰다.
“안시성을 치기에 앞서 신성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곳은 고구려의 보루입니다. 지난번 요동성을 공략할 때도 신성에서 구원군을 보내오지 않았습니까. 일단 그 성을 먼저 함락시킨 후에 안시성을 치는 게 순서입니다.”
당 태종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승상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소. 신성을 점령하고 나서 안시성을 공략하려면 시일이 너무 걸리오.”
부총관 도종이 결기를 보였다.
“소장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신성을 함락시켜 지난날의 실책을 만회하겠습니다.”
“좋다. 도종은 군사를 이끌고 신성을 공격하라. 짐은 본대를 거느리고 안시성을 치겠다. 그리고 비사성에 있는 장량에게 전령을 보내 함대를 이끌고 건안성으로 이동하라고 전하라. 짐도 서둘러 안시성을 함락시킨 후에 건안성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렇게 태종의 지시에 따라 당군은 다시 고구려 서변의 중추인 안시성·신성·건안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심양 아래에 있는 해성(海城)을 빠져나와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강폭이 넓은 강이 나온다. 바로 해성강이다. 이 강은 태자하를 거쳐 요하로 흘러간다. 그 주변에는 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진 토성이 하나 있다. 이것이 바로 안시성이다.
안시성은 동서로 2.5리, 남북으로 1리 정도이며, 둘레가 6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성이었다. 북으로는 해성강, 서로는 팔리하, 동남으로는 대양하와 접해 있고, 천연 해자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충지였다. 성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이 중 서문이 정문이다.
당 태종은 안시성 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영채를 세웠다. 그리고 수하 장수들과 함께 나아가 성내의 동태를 살폈다. 백암성보다는 덜하지만 산 위에 자리하고 있어 공략이 쉽지는 않을 듯했다. 산성이기에 평지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포차를 비롯한 공성 무기들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글 임동주 그림 이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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