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존재 이유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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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신 국제문화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4-03 00:02:40

장웨이(張煒‧67)는 노벨상이나 영화화로 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문단 최일류 작가의 한 사람이다. 다작이면서도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다뤄 왔다. 국내엔 표제작 ‘흥분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단편소설선과 역사 평론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가 나와 있다. 특히 춘추 오패이자 전국 칠웅의 하나였으나 진시황에 멸망한 제나라(현 산동성 일대)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825년간 지속된 제나라 번영과 몰락의 전체상을 풍부한 인문 지식으로 장대하게 그려낸 이 역사 평론이 ‘지속 가능성의 가치’와 이를 뒷받침할 ‘절제의 미덕’을 재인식시킨다. 또 누구든 영원히 1등일 수 없다는 것, 바람직한 상태가 가능한 한 오래 유지되도록 전후좌우 살피며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궁상스러운 구직활동을 접고 귀향해 만년에 인생의 절정기를 맞은 공자가 최고의 책으로 꼽은 게 ‘역’(易)이다. 훗날 유가의 주요 경전이 돼 ‘역경’이라 불리고, 주나라 때 정리됐다 해서 ‘주역’으로도 불린다. 이 책의 눈부신 위상에서 알 수 있듯 중화 문명은 ‘영원 불변한 궁극의 실체’에 무관심하다. 서구 문명의 이데아(신)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다.

중국에선 우주 삼라만상과 세상사를 ‘변화’ ‘움직임의 과정’으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무수한 사상이 꽃피어도 임마누엘 칸트 같은 인식론의 대가가 태어나긴 어려웠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보이고 만져져야 실체다’ …이것이 구대륙 가장 넓은 땅에서 수천 년 거대한 집단을 이루며 살아 온 사람들이 체득한 철리다.

‘영원한 성공은 없다’고 자각할수록 겸허해져야 정상이다. 1980~90년대 일본의 번영을 생각해 보라. 오늘날 여러 면에서 뒤바뀐 우리와 일본, 양국의 처지가 감개무량하다. 당시로선 상상 너머의 일이었다. 훗날 베트남과 대한민국 사이에도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다만 정신차리고 보니 일본을 추월해 있는 우리나라에 비해 중국의 세계 패권에 대한 열망은 문명적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위정자 및 관변 지식인들이야말로 미국의 패권 역시 영원할 수 없음을 가장 간절하게 의식하는 사람들이지 싶다.

한때 동북아인의 로망이던 서유럽은 어떤가. 우리가 동경하던 유럽은 이제 없다. 옛말이 된 풍요로움‧안정‧똘레랑스의 추억 속에서 추락한 삶의 평균치가 두드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것이 한층 가시화했다. 영국 언론인 더글러스 머레이는 ‘유럽의 죽음’에서 이민‧동성애를 비롯한 젠더 문제 등을 통해 통합성 대신 다문화‧다양성을 추구한 결과의 파괴적 현실을 짚었다. 책의 첫머리부터 “유럽은 자살하는 중이다”로 시작된다.

머레이는 에릭 제무르가 ‘프랑스의 자살’을 통해 역설한 내용을 유럽 전체 상황으로 확장시켜 설명한다. 제무르는 “68(운동권)세대의 조롱‧해체‧파괴가 가족‧민족‧노동‧국가‧학교 등 모든 전통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며 이슬람계 이민자들이 전혀 동화되지 않은 채 세를 확장해 온 것, 그리스‧로마와 유대‧기독교 문명의 전통을 근간으로 형성된 유럽이 사멸 위기인 것을 개탄했다.

이런 입장을 ‘극우 꼴통’으로 보는 것이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다. 오늘날 유럽연합(EU) 엘리트의 주류를 지배하는 이 ‘정치적 올바름’에 따르면 성별이란 얼마든 선택‧변경 가능하며 이를 인권으로 존중해야 한다. 가정·교회·국가도 개인을 억업하니 되도록 해체가 답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흐름이 무르익고 있다.

대항해시대 이래 지구촌을 개척한 서유럽 국가들의 업보에 의거해 그 후예인 백인남성을 태생적 죄인으로 보는 비판적 인종 이론도 PC주의의 일부다. 그러나 앞서 간 자들의 오류란 인간 본연의 한계이자 취약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특정 인종·국가를 악마화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지난 수백 년 시행착오 속에서 ‘자유’ ‘인권’ ‘법치’를 수립한 것도 앞서간 사람들이었다.

유럽의 몰락과 장차 심화될 미국 우선주의(고립주의) 시대에 인류를 향한 통합적 메시지를 제시할 사명이 대한민국에 주어진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한반도에 뿌리내린 이후 대제국을 경영해 본 적은 없으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싹이 일찍부터 보였다.

불교·주자학·기독교 전통을 도탑게 공유한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뿐이다. 문명사적 메시지를 이끌어 내려면 이런 고급스러운 지성·영성 체계에 기반한 관념론의 전통이 꼭 필요하다. 중국·일본이 군사 대국이나 경제대국일 수 있어도 향후 인류의 정신적 지도 국가가 되긴 어려운 이유다.

대한민국 역시 국익 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적어도 도덕적 고양을 사회의 주요 지향점으로 여겨야 한다는 공감대가 여전히 굳건한 편이다. 또 먼 옛날 우리처럼 건국이념에 '홍익인간' 같은 거창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내건 예를 달리 들어 보지 못했다.

역사상 이 땅엔 인류 구원의 이상을 추구하는 초월적·실천적 종교 내지 사상 운동이 많았고 오늘날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생각할수록 기독교가 다시 한 번 떨쳐 일어나길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서유럽은 이미 전도(傳道)·재복음화의 대상이다.

임명신 국제문화부장·부국장 imms@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