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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같은 과다활동증 작가들은 크루즈여행의 여유를 권태로 느끼지만 일반인에게 크루즈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그도 그럴 것이 크루즈 단독 여행 경비만도 만만찮은데 비행기를 타고 해외 항구까지 날아가야 하니 시간이며 비용이 일반 패키지여행의 2~3배로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돈 많고 시간 많은 부자 시니어들의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크루즈가 있다. 부산을 모항으로 하는 특별 전세 크루즈가 그것. 한국형 크루즈라 할 만한 이 상품은 롯데관광이 12년째 운영 중인 프로그램으로 11만t급 이탈리아 ‘코스타 세레나 크루즈’ 선박을 투어에 활용한다.
2400명이 한 공간에서 먹고 마셔
‘부산항 5월14일’ 프로그램은 부산을 출발해 사카이미나토-가나자와를 거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4박5일 일정으로 승객의 90% 이상이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항공권 구매나 호텔 예약 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없는 데다 크루즈 특유의 재미와 안락함 때문에 단골로 찾는 이가 꽤 된다.
3500명 정원이지만 롯데관광 측은 2500~2800명으로 승객을 한정한다. 오랜 경험으로 이 정도 인원일 때 승무원도 서비스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승객도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진행한 투어에는 총 240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다. 배에 근무하는 승무원이 1000명 선이고 롯데관광에서 한국인 직원을 100명 파견했으니 탑승 인원 3명 중 1명은 승무원인 셈이다.
여행은 부산항 국제크루즈터미널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별로 인솔자가 있어 미리 문자로 다양한 사항을 안내해 준다. 조당 30~40명의 인원이 배정되는데 긴밀한 관계는 아니지만 기항지 투어와 디너를 함께하기 때문에 여행이 끝날 즈음 서로 간에 얼굴 정도는 익히게 된다.
인솔자 시스템은 한국형 크루즈투어의 특징으로 2400여 명의 탑승객이 혼란 없이 4박5일을 안전하게 지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선상의 삶은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
배에 오르면 바로 쉽투어가 시작된다. 선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인솔자로부터 대극장·그랜드바·라운지·레스토랑 등 주요 장소를 안내받는다. 크루즈는 떠다니는 한 채의 성이어서 그 안에 사람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병원이 있고 쇼핑센터가 있고 식당이 있으며 극장과 수영장·스포츠센터가 자리한다.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기가 무섭게 비상벨이 울린다. 비상대피훈련 시간이다. 구명조끼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서면 직원들로부터 구명조끼를 입는 법과 구명보트의 위치 등을 안내받게 된다.
말도 안 통하는 다국적 선원들이 이리 오라, 저리 가라 하는데도 다들 착실하게 지시에 따른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 같지만 갑자기 파도가 거세져 배가 흔들릴 때 이때 받은 교육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게 사실이다.
비상훈련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선상생활이 시작된다. 크루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친구도 아닌 룸키다. 파트너는 잃어버려도 배 어딘가에 있지만 룸키를 잃어버리면 선상에서의 생활이 중단된다. 코스타카드라 불리는 룸키는 객실 열쇠이자 신분증이며 신용카드다. 이것만 있으면 크루즈 내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탁구채를 빌릴 때도, 음료수를 사 먹을 때도 이게 있어야 가능하다.
크루즈 생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선상신문이다. 선상에서는 인터넷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이 신문을 통해 전달받게 된다. 그날 진행되는 다양한 액티비티 활동과 공연 정보는 물론 레스토랑 오픈 시간과 날씨 등 중요한 공지사항이 적혀 있다. 심지어 조별 미팅시간과 하선 방법도 신문을 통해 전달받는다. 크루즈의 네이버인 셈이다.
필요하다면 선상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는 있다. 일일 16달러(2만 원)의 비용이 든다. 하루나 이틀만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닷새 치를 일괄 구매해야 한다. 현실을 잊고 싶은 이는 외면하고 현실을 벗어던지지 못한 이는 10만 원의 돈을 지불한다.
일련의 크루즈 탐구가 끝나면 바로 즐거움의 문이 열린다. 매일 밤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선내 공연은 크루즈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서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1차·2차 두 번 나눠서 진행되며 진성 같은 특급 가수가 초대된다. 국악인 조엘라와 비보잉 그룹 ‘루나 플로잉’의 공연도 호응이 좋다. 좁은 배에서 닷새를 지내려면 지루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한다.
“크루즈는 넓고 프로그램은 많다.”
첫째 기항지 투어 ‘사카이미나토’
기항지 투어는 크루즈여행의 꽃으로 불린다. 코스타 세레나 호가 이탈리아 선사다 보니 직원도 이탈리아인이 많고 선내 분위기도 꼭 이탈리아다. 기항지 투어는 한 마디로 이탈리아에 살면서 일본으로 여행 가는 느낌이다.
이번 4박5일 투어에는 돗토리현의 사카이미나토시·이시카와현의 가나자와시 두 곳의 일본 도시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람쥐 도토리와 이름이 비슷한 돗토리현은 장엄하게 펼쳐지는 황금빛 사구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돗토리현 끄트머리, 크루즈항이 있는 사카이미나토는 요괴 만화의 상징 미즈키 시게루의 고향이다. 도시 전체가 ‘게게게의 키타로’ 관련 굿즈와 동상으로 즐비하다.
특히 이곳의 중심을 이루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일명 요괴마을로 실개천을 따라 요괴 굿즈를 파는 깔끔한 상점이 늘어서 있어 가볍게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언뜻 심심해 보이지만 한 해 300만 명이 찾을 만큼 일본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다.
돗토리현이 자랑하는 명산 다이센 한복판에는 현립 플라워파크 ‘하나카이로’가 있다. 실내 돔정원 가득히 난초와 키 큰 야자수가 배치돼 있어 이국의 향내를 폴폴 풍긴다. 50ha나 되는 드넓은 장소지만 플라워트레인을 이용하면 15분 만에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한편 다이센산(1709m)은 후지산과 함께 일본 3대 명산으로 꼽히는 곳이다. 제주도의 한라산 같은 곳으로 돗토리현 어디서나 그 당당한 산세가 눈에 띈다. 이곳 다이센지(대산사) 고즈넉한 절 아래에는 무료 족욕탕이 있어 느긋하게 몸과 마음을 쉬어가기 좋다
둘째 기항지 투어 ‘사세보’
두 번째 기항지 투어로 ‘일본의 전주한옥마을’ 가나자와 여행이 약속되어 있었으나 악천후로 성사되지 못했다. 11만t이나 되는 커다란 배가 앞뒤로 진동할 만큼 지독한 폭풍우였다. 수영장 물이 파도치다 못해 갑판을 덮쳤다. 그나마 구명조끼와 구명보트가 있다는 믿음이 두려움을 견디게 해주었다.
기항지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던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닻을 내렸다. 이곳에는 일본 최대의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가 있어 한국인도 많이 찾고 있다. 보통은 후쿠오카와 연계해 방문하지만 사세보항에서 출발할 시 택시로 20분, 기차로 40분이면 충분히 이동 가능하다. 택시 요금은 편도 4500엔(4만 원)으로 네 명 한 팀으로 움직이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하우스텐보스는 처음에는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프랑스·이탈리아 풍경도 들어와 있다. 이곳을 효과적으로 둘러보려면 보트투어를 이용해 한 바퀴 돈 후 대관람차나 돔토른 전망대에 올라 공원 전체를 조망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어트렉션 위주의 놀이공원이 아닌 산책형 공원이다 보니 말초신경 좀 흔들어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온 사방에서 5월의 장미가 현란한 향기를 뿜어 내 방문한 보람은 충분하다.
290m 거리의 작은 마을
처음 크루즈에 탑승하면 식당이나 수영장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던 사람도 며칠만 지나면 어디 레스토랑이 더 낫네, 어디 클럽이 물이 좋네 하며 소소한 것까지 훤하게 꿰게 된다. 따지고 보면 길이 290m 안팎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크루즈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들이 입을 모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관계다. 이곳에서는 대도시와 같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다들 목에 코스타카드를 걸고 다닐 뿐 아니라 정해진 통로를 오가며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이곳에서는 웬만하면 웃고 양보하는 게 좋다.
아침 에어로빅 시간에 빼먹지 않고 참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게임·노래자랑을 선호하는 이가 있고 밤마다 플로어를 누비며 댄스 삼매경에 빠지는 이가 있다.
누구는 뷔페 레스토랑을 들락거리는 일을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로 여기고 누구는 명품 매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갑판에서 여유롭게 노을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방에 틀어박혀 밀린 잠을 청하는 이도 있다.
목적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삶을 즐기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 삶은 세상과의 단절이면서 일상의 연장이다. 배는 망망대해를 떠돌지만 다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크루즈는 우리의 삶을 닮았다.
우리는 넓은 바다의 하잘것없는 점으로 존재하지만 어딘가에 닿게 된다. 이 닷새간의 항해가 지루한 삶에 주어지는 포상이라면 뭍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의 기반이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있기에 떠도는 일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롯데관광에서 진행하는 다음 전세선 투어는 9월12일 속초를 출발해 오타루와 아오모리를 경유하는 6일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내측 선실의 경우 188만 원부터, 오션뷰는 228만 원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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