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88세 양혜숙 선생은 왜 ‘韓劇’ 깃발을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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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공연예술 정립 위해 인생 후반전 올인
“한국 문화 이참에 셰익스피어·체홉 넘어서자”
11월 ‘양혜숙한극상’ 신설... 문화 마중물 넣기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7-30 06:31:10

“지금이 어느 때인데 체홉의 ‘바냐 아저씨’나 셰익스피어의 ‘햄릿’만 반복해서 무대에 올리냐구요. 이젠 우리가 서양을 한번 넘어설 때가 된 거 아녜요? 그러려면 한국 연극을 해야 하는데, 연극이 뭡니까? 한국인의 몸짓과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거든. 그래서 나는 그걸 ‘한극(韓劇)’이라고 불러요. 일찌감치 1990년에 한국공연예술학회를 만들었던 것도 그래서였구요.”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각계 인사 7명이 모였다. 한참 담소를 즐기다가 식사 말미에 좌장 양혜숙(88) 전 이화여대 교수가 입을 열었다. 마침 당신의 신간 ‘사람은 무엇으로 신나는가-한국 공연예술의 뿌리를 찾아서’(어티피컬)가 나왔고, 그걸 서명해 나눠 준 뒤였다. 3분도 채 안되는 즉석 스피치에 평생 당신의 연극 활동의 컨셉을 함축했다. 키워드는 한극이다.

한복에서 한우·한돈까지는 알겠는데, 한극이란 건 뭐지? 한국 연극의 준말만은 아니다. 중국에 경극이 있고, 일본에는 노·가부키·분라쿠가 있듯이 우리도 한국적 공연예술을 하자는 제안이다. 경극·가부키가 전통 공연 양식이라면, 한극은 21세기 우리 당대 한국인의 예술 활동을 총칭한다. 전통 공연의 현대화이고, 우리의 정신과 몸짓이 담긴 새로운 무대 만들기인데, 이게 만만찮다.

“내가 한극을 말한 지가 30년인데 연극하는 사람들은 나를 연극평론가로만 알아요. 춤판에서는 날 무용학자래요. 그들은 연극이면 연극이고, 춤이면 춤이지 왜 한극이란 게 따로 필요하느냐는 의문의 눈길을 보내는 거죠. 물론 내 문제의식을 아는 분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어오셨나요’ 하고 맞장구를 쳐 주지만 그건 극소수죠.”

얼마 전 책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고 양 교수에게 전화드리자 반가운 마음에 그가 해 준 설명이다. 확실히 세상엔 예술 장르을 무슨 칸막이로 알고 그에 안주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의 질문은 간단하다. 세상이 K팝·K드라마 등 한류를 말하는 지금 공연예술에서 셰익스피어·체홉을 넘어선 진짜배기 한국 문화의 성취가 가능할까? 그러려면 그 문화가 보편적 소구력도 가져야 한다.

실은 바로 그것에 목말라서 나는 그 책에 추천사까지 썼다. 제목은 ‘공연예술계의 대모가 전해 주는 멋진 증언’ 뭐 이런 얘기다. 양 교수는 지난해 말 책 원고를 보내 주면서 “버리기엔 좀 아까운 짧은 글들을 모아 놓았다”고 했지만 그건 겸손이다. 책 내용은 1960년대 이후 이 땅을 무대로 펼쳐져 온 거의 모든 공연예술 장르의 흐름을 담아낸 폼나는 증언이다.

그냥 이모저모가 아니고, 한극이란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들여다보고 앞날을 제시하는 작업이라서 소중하다는 평가도 그때 했다. 한극에서는 불교 의례를 비롯해 전통 굿판의 마당놀이·탈춤 등의 재발견이 필수이고, 아악·민속악 등 우리 소리의 재해석도 뺄 수 없다. 오해 마시라. 그렇다고 그가 복고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당연히 인정한다.

그의 시선은 넓고 깊다. 1970년대 벌써 우리 식 무대를 연출했던 전 국립극장장 허규의 소중한 모색을 잊지 않고 있고, 1990년대 전후 우리 연극을 풍요롭게 했던 오태석·이윤택의 빼어난 배우 연출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증인도 양혜숙이다. 그뿐인가. 2007년 나란히 타계했던 춘앵무의 김천흥·진도씻김굿의 박병천 등과도 교유했다.

여창가곡의 어머니 김월하 얘기도 책에 등장한다. 그렇다고 양 교수가 전통에 매몰됐느냐면 천만의 말씀이다. 본래 그는 1960년대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그 옛날 서울에 소개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젊을 적 그가 서구의 전통 무대에 반기 든 한트케 류의 반(反)연극을 익혔던 것이 포인트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동서를 넘어선 한국만의 제3의 무대를 꿈꿨고, 그게 지금은 끝내 한극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물론 그의 한극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는 자기 만족이 아니다. 그건 퇴행이다. 그리고 한류를 하이브의 방시혁이나 JYP·SM·YG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탁영준·양현석 등에게 맡기면 그냥 만사 오케이일까. 그렇게 하면 한류는 뻗어 가고 문화 융성은 자동인가.

그 점에서 양 교수의 책은 지도책이다. 우리가 걸어온 길, 나아갈 길을 한눈에 보며 신발끈을 고쳐 맬 수 있다. 무엇보다 준비된 젊은 스타들이 지금 치고 나오라는 신호탄이 이 책인데, 양 교수도 출전한다. 올 11월 당신의 이름을 딴 ‘양혜숙한극상’ 첫 수상자로 젊은 기대주를 뽑아서 시상한다.

맞다. 말만 하지 말고 앞세대가 마중물을 넣어 줘야 후학이 따라오지 않을까.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이 책 제목이 뿅 갈만큼 멋지다. ‘사람은 무엇으로 신나는가’. 먹고 입는 것 다음은 신나는 삶이 아닐까. 그건 놀이문화와 그걸 양식화한 공연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극이란 깃발, 새삼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