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00] 슬픔에 갇혀 자라지 못한 아이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진심보다 진실한 거짓 고백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29 06:30:30

“하지만 이거 찾고 알았어. 당신은 현재의 날 사랑했고 결혼했다는 거.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 생기니까 그깟 추억, 당신이 기억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어.”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슬프니……? 언제나 묻고 싶었어. 당신을 보면, 어두운 얼굴로 출근할 때도, 어깨 축 늘어뜨리고 퇴근해 들어올 때도. 캄캄 절벽 위에서도 절대 손 놓지 않을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어. 이혼하자고 했을 때 싫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당신한테 묻고 싶었어. 밥은 먹는지, 잠은 자는지……. 슬프니, 지금도 슬프니……? 슬픔에 갇혀 있는 당신, 안아 주고 싶었어.”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 연민과 사랑과 원망이 뒤섞여 흔들렸다.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내 모든 인생이 눈앞에서 역류하며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외로웠어. 사랑받고 싶었어. 당신을 만지고 싶었어. 날 만지는 당신과 살고 싶었어. 그 시시한 바람으로 견뎠어.”

아내가 떨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마리아였다는 걸 당신이 알았다면 달랐을까.”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자신만 연민하는, 그때 그 서점 모퉁이에서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아이.”

아내는 가엽다는 듯, 그러나 내 시선을 외면하고 냉정하게 일어섰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이제 어설픈 모성애 흉내를 내던 열한 살 아이가 아닌걸. 내겐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진짜 내 아이가 둘이나 있으니까.”

아내가 가방과 코트를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가지 마!”

내가 중얼거렸다. 아내가 멈췄다.

“돌아와 줘!”

비명처럼 내가 외쳤다. 아내가 나를 돌아보았다.

“소중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당신이 떠나고 깨달았어. 난 당신 없이 안 돼!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 우리 강건, 강한도 보고 싶어 미칠 거 같아.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줘.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매달리듯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다. 아이들을 사랑했다. 뒤늦게야 내 마음속 진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었다.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었다. 하운이 옳았다. 나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존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잃어버린 것들, 나를 떠나 버린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매달리는 이유는 아내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롭고 무섭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록 아쉬운 것이다. 그래 놓고 사랑을 운운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외로우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 난 상관없어.”

나를 내려다보던 아내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듯, 매몰차게 손을 뿌리쳤다.

“내 인생에 절대 그럴 일 없어.”

내가 아내를 막아서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야.”

나는 떳떳하다는 듯, 아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나 이내 항복하듯 시선을 발등 위로 떨어뜨렸다. 죽음을 핑계 대고 지난밤, 미친 듯 하운을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수십 번, 수백 번 그녀의 귀에 고백한 나였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