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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얼굴이 파르라니 떨렸다. 모욕적이라는 듯 코트를 꿰어 입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는 접시를 닦았다. 붕대를 감은 손에서 피가 벌겋게 배어 나왔다.
“슬프니?”
아내가 송곳처럼 물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 끝에 서 있는 아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도 슬프니?”
아내가 앙칼지게 물었다. 접시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깨졌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둘째 낳고 얼마 안 됐을 때야. 애들 방 만들다가 찾았어.”
아내는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서 낡은 구두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와 식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색이 희미하게 바랜 연꽃 등이었다. 아내는 연등 옆에 누워 있던 유리병을 식탁 위에 꺼내 놓았다. 나는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 맞은편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보물 상자 속에 간직하고 있었어. 당신이 내게 주었던 눈사람. 물은 다 증발했어. 아끼느라 먹지 못한 사탕만 남았네.”
병 밑에 흙이 몇 알 남아 있는 것인가. 이제는 색이 바랜, 붉은빛이 남아 있는 포장지에 싸인 막대 사탕이 하나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십 년 넘게 녹았다 굳기를 반복하며 콩알만 하게 줄어든 사탕은 끈적하게 흘러나온 내용물과 포장이 눌어붙어 도무지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부모도 친척도 없는 엄마가 병이 심한 걸 알고 도망갔대. 치료는커녕 나 데리고 굶어 죽게 생겨서 가끔 다니던 암자에 들어가 몇 달 의지하고 살다 돌아가셨어. 스님 할아버지가 한 2년 날 키웠어. 가난한 절이었지만 이따금 누군가 죽었다고 사람들이 찾아왔어. 장례 끝나면 시줏돈 받아 치킨을 사 주셨어. ‘생명을 살게 하는 건 죽음이란다.’ 뜻 모를 말씀을 하시며 내가 맛있게 먹는 걸 무척 흐뭇해하셨어. 몇 시간이나 향냄새 맡으며 염불하느라 지친 목은 곡차로 풀어 주어야 한다고, 그런 날은 시원하게 오백 씨씨 맥주 한 잔은 꼭 드셨어. 누군가 죽는 게 좋았어. 당신을 처음 만난 날도, 그래서 화장터에 따라갔던 거야.”
아내가 서 있을 기운도 없는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이 좋았어. 지금 부모님께 입양되었으니까. 암자에 다니시던 엄마가 날 눈여겨보셨던가 봐. 아버지가 군인이셨잖아. 자주 이사 다녔어. 그래서 한 학기 만에 또 전학 가야 했던 거야.”
아내가 물끄러미 피가 배어난 붕대 감은 내 손을 바라보았다.
“우연이 아니었어. 내가 아버님 교회로 찾아갔어. 달봉 씨는 거짓말처럼 날 바로 알아봤지. 우리 만나던 그날, 제과점에서 우리 두 사람, 눈이 마주쳤을 때 당신인 걸 알았어. 우리 정말 인연이구나, 그랬어.”
아내가 쓸쓸히 미소 지었다.
“이까짓 게 뭐라구.”
아내가 연꽃 등과 유리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처음엔 당신이 모르는 것 같아서 서운했는데 말하기 싫었어. 어렸을 때 내가 좀 당돌했잖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했어. 오히려 당신이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었지. 당신에게 나는 별로 중요한 기억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고.”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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