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036] 양귀비꽃은 호국 영령 추모의 상징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문학

영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적 문제가 된 양귀비꽃 배지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1-11 09:09:03

▲ 개양귀비·털양귀비 등 관상용 양귀비에는 마약 성분이 없다. 윤상구 사진작가

해마다 11월11일에는 6·25전쟁 때의 유엔군 전사자들이 안장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행사가 열린다. 이날 오전 11시에 맞춰 전 세계인이 부산을 향해 1분 동안 묵념을 하며 전사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한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인 11월11일은 영연방국가에서는 ‘영령기념일(Remembrance Day)’로, 미국에서는 제대 군인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영연방국가 국민은 11월 한 달 동안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며 양귀비꽃 배지를 가슴에 단다.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는 80여 종 중 네 종류뿐

양귀비의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으로, 그리스어 이름은 ‘오피움(opium)’이었고 ‘아편(阿片)’은 이를 중국에서 음역하여 만든 용어이다. 아편이라는 마약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는 80여 종 중 네 종류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품종들의 재배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 외에 흔히 볼 수 있는 개양귀비 등 관상용 양귀비에는 마약 성분이 없다.

서양에서는 개양귀비꽃의 꽃말이 ‘죽어간 병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플랑드르 전선에 투입되었던 캐나다군 군의관 존 맥크래(John McCrae) 중령은 한 달 만에 친구 알렉시스 헬머 중위를 잃었다. 이후 그는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는 표식이네’라는 내용을 담아 ‘플랑드르 들판에서’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우리는 편히 잠들지 못하리/ 여기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이 자란다 해도’라고 마무리되는데 그때 그가 본 꽃은 개양귀비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맥크래가 ‘포피(poppy)’라고 썼기 때문에 양귀비꽃으로 번역되었고 양귀비꽃은 비극적인 전쟁의 상징물이 되었다.

영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매년 11월 개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를 달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이다. 그런데 이 양귀비꽃 배지는 영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2010년 11월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총리를 비롯한 영국인들이 양귀비꽃 배지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양귀비꽃 배지가 아편전쟁을 연상시킨다며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영국은 100년 가까이 내려온 자국의 전통이라며 이에 맞섰다.

중국인에게 아편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양귀비꽃

▲ ‘아편’은 그리스어 이름은 ‘오피움’을 중국에서 음역하여 만든 용어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중국과 활발하게 무역을 했다. 중국 차는 영국인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중국인들은 영국이 파는 모직물이나 면직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무역 수지 적자를 면할 수 없었고,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기로 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에 팔았고 인도에는 영국산 모직물을 팔았다. 영국은 인도로부터 받은 국제 화폐 은으로 중국 차를 수입했는데 이른바 삼각 무역이 이뤄진 것이다. 인도산 아편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간 후 중국 사람들은 아편을 담배 피우듯 피웠고 중국 국민의 정신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중국은 아편 금지령을 내렸지만 거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아편 단속을 위해 광둥성으로 보내진 관리 린쩌쉬[林則徐]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영국 상인들로부터도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하여 녹여버렸다. 막대한 손해를 본 상인들은 자국 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고 영국 의회는 중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1840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고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편전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 중국

영국군은 양쯔강을 거슬러 난징으로 쳐들어갔다. 곧 수도 베이징에 들이닥칠 태세에 놀란 중국은 영국과 서둘러 강화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쟁에 참패한 중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몸집만 클 뿐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 세계에 드러났고 거액의 전쟁 배상금과 아편값을 영국에 물어주게 되었다. 가장 큰 대가는 홍콩을 100년 동안 영국에 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은 영국의 트집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국기를 단 배를 중국 관리가 수색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영국은 이 전쟁에 프랑스까지 끌어들였다. 광저우를 초토화한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으로 쳐들어가 황제의 정원인 위안밍위안[圓明園]에까지 대포를 쏘았다. 이후 위안밍위안은 복구되었지만 일부 석조 건물은 아편전쟁 때 파괴된 채로 보존되어 있다.

호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으로 전사한 8,500여 명의 호주군을 기리기 위해 4월 25일을 ‘안작데이(Anzac Day)’로 정해 개양귀비꽃으로 만든 조화를 헌화한다. 어떤 전쟁이든 공격한 측이 있으면 공격당한 측도 있게 마련이다. 가끔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런 연유가 아니라도 양귀비를 비롯한 어떤 꽃도 어느 한쪽의 전유물이나 상징물이 될 수는 없다. 전쟁은 전쟁이고 꽃은 꽃이기 때문이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스카이데일리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