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Talk] 가수 제시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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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원 정치사회부 차장대우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1-20 00:02:30

최근 언론에 회자된 ‘제시 사건’은 지난달 11일 한 시사프로가 9월29일 새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찍힌 CC(폐쇄회로)TV 영상을 공개하며 시작됐다. 영상에서 가수 제시는 자신에게 다가와 사진 촬영을 요청하던 팬이 자신의 일행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자리를 떠났다. 이후 피해자와 누리꾼 등으로부터 고소·고발당하여 범인 은닉·도피 혐의로 경찰 수사까지 받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그는 전속 계약 한 달 만에 소속사와 결별했다. 제시는 폭행 사건을 피하는 모습이 자신도 모르게 촬영되어 공개된 후 인생과 커리어가 망가지고만 꼴이다. 공인이라지만 당하는 개인에게는 ‘테러 사건’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기자는 가수 제시를 미국 뉴저지에서부터 알고 지낸 미국인 지인을 만났다. 사건의 민낯을 알고 있다 밝힌 그는 “가해자는 대만계 미국인이다. 그런데 중국인이라는 가짜뉴스가 퍼져 나가 중국인 혐오로 마녀사냥의 불길이 거세졌다. 피해자는 만 18세 학생으로 다 큰 성인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언론이 무작정 고등학생으로 프레임화하며 공분이 커졌다. 제시가 팬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지만 새벽에 갑작스레 다가와 사진을 찍어 달라 강요했고, 술을 먹은 상황에서 이를 두 차례 거절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총기 소유를 할 수 있는 미국 사회에서는 폭행 사건이 살인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인에 비무장 상태인 제시가 신변 보호를 위해 자리를 피하는 건 자연스러운 대처였을 것이다. 이를 두고 지인은 “제시의 잘못이 있다면 친구의 지인이 팬을 때리는 걸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고 방관했고 자리를 피한 뒤 그 가해자(프로듀서 코알라의 지인)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 것이다”고 부연했다.

제시에겐 사회·경제적 피해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정신적 폭력은 극에 달했다. 제시는 온라인 마녀사냥 화형대에 올랐다. 무차별 폭행을 가한 후 한국을 떠난 중국인으로 알려진 가해자를 대신해 여론의 가혹한 돌팔매질을 견뎌야 했다. 가해 남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시의 주장은 묻혔다. 설상가상 사건 이후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마른 들풀에 불이 붙은 듯 여론의 도마에 오른 그에 대한 난도질이 온라인커뮤니티와 뉴스 판을 도배했다.

사과문을 올리고 고통을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경찰서 출석 당시 ‘표정이 건방졌다’는 등의 온라인 글이 쏟아진 것을 보고 17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의 ‘세일럼 마녀 재판’을 배경으로 한 영화 ‘크루시블(The Crucible)’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무고한 주인공 에비게일을 향해 한 여자아이가 “악마가 보인다”고 소리 치자 모두가 에비게일을 ‘악마’로 인정해 버리는 진정한 집단 광기의 모습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제2·제3의 제시가 상존해 왔다. 2000년대 이후 온라인 미디어 공론장이 열리고 ‘표현의 자유’라는 절대 반지와 같은 헌법상 권리를 통해 유사·사이비·흑색 언론이 횡행했다. 이에 기반한 온라인커뮤니티 내 가짜뉴스가 편향성을 가지고 퍼져 나갔다. 사방에 CCTV가 설치된 도심에서 모두의 손에 고성능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이 쥐어지며 ‘순간의 찰나’가 ‘영구 박제’가 되어 공유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확산성을 갖게 됐다.

미국 신학자 라인 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1930년대 대공황을 겪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사회적 갈등이 치솟자 극단적 이념과 집단 논리를 기준으로 한 도덕적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를 배경으로 잣대를 만들어 ‘모난 돌 정 치듯’ 증오의 배척 대상을 찾아 그를 제거하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숱하게 많은 이가 공론장에서 희생됐고 그럴 때마다 짧은 추모가 있었으나 악마의 맷돌은 멈출 기미가 없다. 모두가 제시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제동장치가 필요한 때다.

장혜원 정치사회부 차장대우 hyjang@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