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유통시장이 ‘오징어 게임’ 현장이 됐다. 유통기업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소비침체가 길어지고 업체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본력이 취약한 온·오프라인 기업들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
최근 명품 플랫폼 발란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최영록 발란 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올해 1분기 내 투자 유치를 일부 진행했지만 추가 자금 확보가 지연되면서 단기적인 유동성 경색에 직면했다”며 “파트너들의 상거래 채권을 안정적으로 변제하고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회생을 신청하게 됐다”고 밝혔다.
발란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온라인 플랫폼이 급성장하면서 기업가치도 뛰었다. 실제 2022년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할 당시 3000억 원으로 인정받았던 발란의 기업가치는 최근 300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발란뿐만 아니라 명품 플랫폼 기업들이 휘청이고 있다. 2023년 기준 발란의 영업손실은 100억 원·머스트잇 79억 원·트렌비는 32억 원이다.
작년 7월 티메프(티몬·위메프)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이들은 연간 거래액 7조 원을 웃도는 국내 6·7위 규모의 거대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자본잠식 상태에서 현금 흐름이 악화되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당시 티메프가 정산하지 못한 입점 업체 판매대금은 1조2790억 원을 기록했다. 피해를 입은 입점 판매사는 5만여 곳에 달했다.
연매출 7조 원 규모의 대형마트 업계 2위 홈플러스도 3월 전격적으로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홈플러스 사태 역시 유동성 위기가 결정적 원인으로 꼽힌다. 홈플러스는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 비율이 급증하는 가운데 판매 실적까지 부진하자 납품대금 지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굵직한 유통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사례는 그동안 보기 드물었다. 반년 사이 기업 3곳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건 유통기업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소비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불황을 겪는 유통업계는 기업 생존의 여부를 가름할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들어갔다. 이에 유통기업들은 재무구조 개선에 초점을 두고 몸집 줄이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AK플라자’라는 유통업체를 가지고 있는 애경그룹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알짜 사업인 애경산업 매각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현대면세점은 2020년 문을 연 시내면세점 등 동대문점을 7월 폐점할 예정이다. 무역센터점도 매장을 축소하고 공항 면세점 운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내 면세점 철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롯데면세점은 2022년 코엑스에 있는 시내 면세점을 폐점했고 작년 6월부터 비상경영 체제를 선언했다. 이후 국내 최대 시내 면세점인 잠실 월드타워점의 영업 면적도 줄였다. 신세계면세점은 1월 부산 센텀시티점의 문을 닫았다. 두 회사는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며 인력 감축에도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티메프 사태가 촉발한 유통업 구조조정이 앞으로 더 빠르게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유통산업 전망 조사에 따르면 올해 소매시장 성장률은 0.4% 수준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직격탄을 맞은 2020년 이후 가장 저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유통시장을 보면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중국계 이커머스 플랫폼이 강력한 자본력과 초저가 상품을 무기로 공세적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유통업계는 내수 부진과 중국 이커머스의 공세로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지금이야말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 2의 홈플러스 사태가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