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땔감도 없는 당 간부의 집
집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심하게 앓고 계셨다. 하지만 원래 의지가 강한 분이라 일어나 앉아 내 인사를 받으셨고 내가 준비해 간 스웨터를 받으시고는 죽기 전에 장손이 사다 주는 옷을 다 입어 본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할머니는 1년 전부터 당장 돌아가실 것처럼 무척이나 심하게 앓으셨는데 그때마다 큰손자가 보고 싶다고 나를 찾으셨다고 했다. 아마도 큰손자를 이렇게 만나보려고 그러신 것 같다며 이제는 나를 보았으니 돌아가셔도 눈을 감으실 것 같다고 했다.
휴가 1주일 동안 나는 부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들을 만나 함께 술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있었던 일들과 업무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든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하면 안 되는 보안사항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지내면서 보니 땔나무가 거의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할머니 간병을 하느라 가을에 땔나무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고, 또 조금 해 놓은 것이 있기는 하나 날라 오지 못했다고 하셨다. 사실 아버지가 1개 리(里)의 당 조직을 책임진 초급 당비서(리당비서)를 하셨지만 워낙 말씀이 없고, 특히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셔서 집에 땔나무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간부에게 이야기해서 나무를 실어 오게 했다.
다시 집을 떠나 초대소로
그 후 휴가 기일이 다 되어 집을 떠나야 했는데, 군당(郡黨)에 이야기하니 군당 선전부장이 도당(道黨)에 회의 때문에 가는데 같이 차를 타고 가자고 했고, 나는 군당 선전부장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해주까지 갔다. 막상 군당 선전부장을 만나고 보니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사로청위원장을 할 때 사로청지도원을 했던 강성원이라는 사람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해주에 도착한 후 도당 11과 지도원이 구입해 준 승차권으로 열차를 타고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해 담당 지도원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초대소로 갔다.
초대소에 복귀한 후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는데, 나는 담당 지도원에게 집에 땔나무가 없어 대책을 세운 것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다시는 추운 겨울에 휴가를 안 가겠다”고 덧붙였다. 도당에서 휴가를 위해 차를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아버지에게 떠넘겨 결국 아버지만 고생시켜 드렸는데 다음부터는 아버지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울러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고 3시간 동안 떨면서 집에 도착했는데,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휴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당 지도원은 앞으로 책임지고 대책을 세우겠다고 내게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부터는 휴가 갈 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휴가를 다녀온 후에도 사상이론교육과 공작 실무교육 등을 계속 받았고, 얼마 후 사회에 나가서 하게 될 노동 현실 체험 준비도 했다.
공작원을 지도핵심으로 키워라
1980년대 초 김정일은 공작원들의 세대 교체와 관련하여 새 세대(신세대) 청년들을 선발하며 그들을 지도핵심으로 키울 것을 강조했다. 새 세대라는 명칭은 북한 영화 ‘조선의 별’에 나오는 김일성의 청년 시절 동료들을 지칭하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만 해도 공작원 대부분은 6·25전쟁을 전후로 월북한 남한 출신이었고, 그들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남한에서 대공수사 기관의 방첩 활동이 강화되고 연고자들의 자수 권유나 주민들의 간첩 신고, 혹은 공작원의 자수와 변절 등으로 간첩망 붕괴 사고도 잇따랐다. 따라서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할 수 있는 공작원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북한 출신에 의한 대남 공작원 세대 교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이 강조한 지도핵심 육성 방침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새 세대 청년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하면 그들 대부분이 사회생활 경험이 적기 때문에 이들을 능수능란한 공작원으로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여건에서 여러 측면에서 부족한 젊은이들을 능력 있는 공작원으로 키우기 위해 제시된 것이 바로 김정일의 지도핵심 육성 방침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핵심 육성 방침의 첫 번째 핵심 내용은 공작원을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투철한 사상적 각오를 가진 사람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주체의 혁명이론과 전략전술로 철저히 무장하고 정세를 스스로 판단하며, 조성된 정세에 맞는 투쟁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것은 물론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 또한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정세 판단 능력과 책략 수립 능력·조직 지휘 및 운동 지도 능력을 소유한 사람, 혁명적 사업 방법과 인민적 사업 작풍, 그리고 전술·기술적 능력을 갖춘 공작원으로 육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자질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지도핵심’이라는 것이다.

김종태와 조르게 같은 사람으로 키워라
김정일이 강조했던 지도핵심의 징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공작원을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냈던 김종태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북한으로 치면 도당책임비서(도지사)나 중앙당 부장(장관) 급으로 키우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 공작원들을 만능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에서 활동한 구(舊)소련의 이름난 공작원이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실제로 일본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지적인 수준에서는 조르게처럼 어느 한 분야의 박사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다방면으로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소유한 ‘박식가’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육체적인 능력이나 군사·기술적 측면, 그리고 사람·조직을 다루는 면 등 모든 측면에 있어 수준급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이러한 지도핵심 육성 방침을 관철한다며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가 새롭게 도입한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이 노동 단련(노동 현실체험) 프로그램과 간부현실체험 등이다. 북한 출신 공작원을 남한 사람처럼 만들기 위해 도입한 적구화 교육, 즉 한국인화 교육과 그 후에 새로 생긴 연구원(대학원)과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하에서는 독재자가 원한다면 필요한 천재들을 전국에서 모두 불러 모아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거나 투자하는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기 위해 집중 투자하고 대남 공작원 양성을 위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세우고 인재들을 엄선한 다음 인간병기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4년간의 혹독한 단련을 거친 뒤 노동 단련과 간부 현실체험을 거쳐 적구화 교육에 투입된, 바로 이 ‘새 세대 출신’ 1세대 공작원인 셈이다.
막일꾼으로 변한 공작원
먼저 노동 단련(또는 노동 현실체험)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넘어 가자.
공작원의 ‘노동 단련’이란, 말 그대로 실제로 노동을 해 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각종 방법이나 기술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공작원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을 실시한다. 그래서 ‘노동 현실체험’이라는 표현보다는 ‘노동 단련’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한마디로 막노동을 직접 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노동 현장이 훈련 장소가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각종 건설 현장이나 광산·제철소 등 주로 육체적으로 힘을 많이 써야 하는 현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된다. 노동 단련은 원래 공작원들에게 시키던 직업기술 훈련을 변형시킨 것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연락부 공작원들에게 적용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첫 번째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물론 김정일의 지도핵심 육성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다른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전까지는 공작원들이 나이 많은 남한 출신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출신의 젊은 세대로 바뀐 것과 관련된다.
나이 많은 공작원들은 이미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노동 단련을 다시 시킬 이유가 없었는데 1980년대 당시 젊은 공작원들은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공작 방향이 달라진 것과 관련된다. 그전처럼 남한에 침투해 공작 거점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잠복해서 직업 활동도 하며 사람들을 사귀고 그 과정에서 공작 여건을 조성해 점차적으로 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사전에 공작 대상을 미리 선정한 뒤 남한에 침투 후 단기간 내에 그를 포섭하고 복귀하는 속전속결의 전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작원들은 남한 침투 후 복귀로 차단 등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정이 발생해 공작 기간이 연기되지 않는 한 따로 일정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직업기술 또한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대학을 갓 졸업했기 때문에 노동을 해 본 적이 없거나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이루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공작원들에게 사회 현실을 체험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노동 단련’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 단련은 모든 공작원이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공작원에 대해서만 실시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소환된 대상들이 포함되는데, 기간은 대체로 6개월 또는 1년이었다.
노동 단련을 할 때는 해당 노동 현장에 가서 그곳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하며, 일한 만큼 월급도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 방법을 익힐 뿐만 아니라 건전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배양하며 수양을 쌓고 사회 현실과 군중의 심리 또한 파악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체득하는 데 그 기본을 두고 진행한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에서는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하나요? 예를 들어, 우리처럼 구석기시대부터 쭈욱 내려와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 등의 시대순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우리 분단의 역사에 관해서는 어떤 식으로 배우셨는지요?
아버지 : 북한에서도 역사 교육은 한국에서처럼 구석기시대부터 내려오면서 신석기시대·봉건시대(조선시대)·일제 강점기 등의 시대순으로 역사 교육을 하고 있어. 선대 역사가들이 인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한 것에 대해 북한이 더 이상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니까 북한도 어쩔 수 없이 시대별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
그렇지만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시대 별로 역사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왕조 체제를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거나 외세에 반대해 투쟁했던 내용 위주로 가르치지.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뛰어난 왕들이 세운 업적은 전혀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아무리 대학을 나왔어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나도 대남 공작원을 할 때까지는 몰랐으니까….
특히 현대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이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독립시켰다고 가르친다든가, 남북 분단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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