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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 사흘 전 중정 통해 육군본부 전파… 사단장까지 인지
[단독: 5·18 진실 찾기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전남 신안 앞바다로 상륙 후 잠입” 첩보
사태 파악 급파한 수색 중대 17일 습격당해
軍, 예비군 무기고 탈취 첩보입수 경계 발령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8-30 00:15:01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1980년까지 북한의 침투 다발지역으로 꼽히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백바위 해안. 간조시 차량이 다닐 정도로 땅이 견고한 지역이다. 5·18 직전 이곳과 해안선이 맞닿은 남쪽 신안군 앞바다를 통해 북한 공작조가 침투했다는 첩보가 군에 전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스카이데일리
 
1980년 5·18 직전 정보당국이 북한 공작조의 서해안 침투 첩보를 군에 전파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첩보는 군의 보고체계를 거쳐 사단장급 이상 고위 장성에게까지 올라가 공유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군은 사태 파악을 위해 20사단 1개 수색중대를 현장으로 급파했지만 전라남도 해안지대로 향하던 첨병조는 5월17일 광주 송정리 일대에서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사단 수색중대 첨병조의 피습은 새로운 증언이다. 
 
지금까지는 이른바 ‘군분교 습격 사건’으로 불리는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지휘 차량 피습 사건이 5월21일 아침에 한 차례 있었다고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됐지만, 이보다 4일 먼저 수색중대가 습격당했다는 첩보는 처음 공개된 것이다. 
 
수색중대는 차량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부대원이 괴한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 3주간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군은 같은 날 예비군 무기고가 습격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예하 부대에 발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본지는 무기고 탈취가 21일이라는 시민군 주장과 달리 최초의 무기고 습격은 19일이라는 복수 목격자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본지 6월21일자 軍레커 몰고 무기고 담장 돌진… 청년 20명 ‘우르르’ 보도 참조> 
 
따라서 당시 무기고 피습 가능성을 인지하던 군을 상대로 무기류 탈취에 성공한 이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군과 정보당국의 첩보를 토대로 이 사건을 보면, 계엄군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시민군 측 주장은 더 설득력을 잃게 된다. 
 
2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육군본부는 관할부대이던 20사단과 71사단에 북한 공작조가 5월15일 전남 신안 앞바다를 통해 침투했다는 첩보를 전파했다. 구체적인 규모와 침투루트·은신처는 첩보상황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은 산발적인 시위가 격화됐고 경기 양평에 있던 20사단은 데모 진압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해 태릉에 주둔해 있던 71사단과 합류했다. 예비군을 관리하는 동원사단이었던 71사단은 경찰력이 부족한 데다 관내 6개 대학 시위 대응으로 전력이 약화돼 육군본부에 지원을 건의한 데 따른 병력 이동이었다. 
 
이들 2개 사단은 서울을 위수하던 수도군단 예하 전투부대였다. 복수의 증언에 따르면 육군본부의 첩보는 중앙정보부(중정)로부터 처음 전파됐다. 정보당국이 최초 첩보를 입수해 군에 하달한 것이다. 
 
당시 사단 작전참모를 지냈고 장군으로 예편한 예비역 장성은 최근 본지 취재진에 “5·18이 일어나기 3일 전에 육군본부로부터 전남 신안 앞바다를 통해 북한 공작조가 들어왔다는 첩보가 전파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최초 전파일을 5월15일로 특정했고 첩보의 출처로 ‘중정’을 지목했다. 
 
추적하던 軍 첨병조… 5월17일 송정리서 ‘의문의 피습’ 
 
신안 앞바다 침투→광주 잠입... 무기고 습격 등 주도 가능성 
“계엄군 반발 차원에서 총기 탈취” 시위대 주장 설득력 잃어 
 
5·18을 목전에 두고 북한 침투조가 전남지역에 잠입했음을 우리 정보당국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증언자는 “최초 첩보는 중정을 통해 육군본부에 전파됐고 작전참모를 거쳐 사단장 이상에게 보고됐다”며 “서울을 지키는 사단급 부대들이 이 첩보를 인지하고 만일에 있을 사태에 대비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증언에 따르면 이들 사단의 작전 참모진은 평소 시위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공조하기 위해 정보를 교류했다. 육군본부로부터 구체적인 투입 및 차단 지시가 직접 내려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 와중에 대학생 데모대가 아닌 북한의 침투 첩보가 육본으로부터 새롭게 하달된 것이다. 증언자는 “5월부터는 퇴근하지 못할 정도로 중정 첩보가 육본을 통해 계속 전달됐다”며 긴박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육군의 작전참모진은 육본 작전참모와 수도군단장 휘하의 군단 작전참모·사단 작전참모·작전과장·작전장교 등으로 구성된다. 증언자는 “사단 참모진끼리도 이 첩보를 공유했다”고 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71사단장과 20사단장은 상의한 뒤 첨병조를 전남에 급파하기로 했다. 육본은 직접 첨병을 보내 빨리 사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사단 수색중대는 오히려 송정리역 일대에서 군용차량을 탈취당하고 부대원들은 부상했다. 이에 대해 증언자는 “당시 상황일지와 보고문에도 모두 기록된 사실”이라고 했다. 
 
군 북한정보 관련 부서에 있었던 예비역 장군도 최근 본지와 통화에서 “신안 앞바다를 통한 침투 첩보가 들어왔고 군이 정식 대응했었다”고 확인했다. 그와 또 다른 예비역 장교 출신의 5·18연구가들은 구체적인 해안 침투정보에 대해 본지에 보충 설명했다. 
 
5·18을 전후해 전남 경찰의 움직임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나주 금성파출소는 19일 경력이 빠졌다는 증언이 나왔고 20일엔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종적을 감춰 문제가 됐다. 5·18 직전에도 곳곳에 치안 공백 사태가 벌어져 시민 불안이 가중됐다. 사정이 이러자 군은 무기고 피습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전남 향토사단인 31사에 병력 투입을 지시했지만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 직후 투입된 부대가 7공수여단이었고 5월18일 신원미상의 청년들이 7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고 파출소에 방화하면서 5·18이 본격화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튿날인 19일 나주 금성 파출소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과 M1·AK소총 등 769정이 탈취됐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상황일지에 따르면 군·경은 총기류 외에도 LMG 4정·LMG 실탄 6만 발과 수류탄 182개를 빼앗겼고 시민과 계엄군의 비극적인 유혈 교전사태가 비로소 시작됐다. 
 
한편 이번 취재 과정에선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5·18 전후 행적에 관한 구체적인 증언들도 있었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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