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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636년,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이었다. 백제 무왕은 사비하(泗沘河) 북포(北浦)에서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왕후 선화(善化)와 대소 신하들이 참석했다. 연회장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바위 사이마다 이름 모를 꽃과 풀이 자라나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이었다.
무왕은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르자 손수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왕위에 오른 후에 겪었던 영광과 회한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신좌평 기미(岐味)가 축수를 올렸다.
“폐하, 이제 사방이 조용하고 평안합니다. 태평성대란 오늘날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무왕은 마음이 넉넉해져 신하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 줬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대들 덕분이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어느덧 태자인 의자(義慈)의 차례가 됐다. 태자는 공손한 태도로 술잔을 받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무왕은 술을 따라 주고 나서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냐?”
의자는 할 말이 많았다.
무왕은 재위 초기에는 신라를 쳐서 영토를 넓히고 나랏일을 돌보는 데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사를 등한시하고 풍류에 빠졌다.
국왕의 사치와 향락은 도를 넘어섰다. 2년 전에는 궁궐 남쪽에 거대한 인공 연못을 축조하기까지 했다. 못 둘레에는 풍치 있는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는 방장산(方丈山)을 본뜬 섬을 만들었다. 이후로는 이곳에서도 자주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고 측근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근래에 와서는 왕자 교기(翹岐)를 맹목적으로 총애하여 후사로 삼을 뜻까지 은근히 내비쳤다. 이에 교기를 등에 업은 기미와 같은 간신들이 득세하여 나라를 어지럽혔다.
연회에 모인 신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리자 의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왕의 심기를 거스르면 태자의 자리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태자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폐하의 은덕이 사해(四海)에 떨치고 있는데 소자가 불만일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수년 전부터 정사에 소홀하신 듯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왕은 술맛이 확 달아났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인생을 좀 즐겨 보려 하는데 태자가 트집을 잡고 나서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려고 했지만 옆에 앉은 왕후가 눈짓으로 말리는 통에 참았다. 하지만 기분이 몹시 상해서 더는 연회를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왕은 곧바로 잔치를 파하고 궁으로 들어갔다. 여흥이 깨지자 대신들도 엉거주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의자는 무안한 마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성충·윤충·흥수 등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할 말은 하는 성충(成忠)이 먼저 말을 꺼냈다.
“태자께서 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의자가 답답해서 언성을 높였다.
“나도 최대한 조심했소. 그런데도 결국엔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구려. 그렇다고 나라가 망해 가는 꼴을 두고 볼 수 만은 없지 않소.”
진중한 흥수(興首)가 간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태자이십니다.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처신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잠자코 있던 윤충(允忠)이 반박하고 나섰다.
“뭐가 무서워서 그리 저자세로 나간단 말입니까. 태자로서 할 말은 해야지요.”
수하들이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펼치고 있을 때 의자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교기를 이대로 두고 봐야겠소?”
성충이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며 아뢰었다.
“효행(孝行)을 정성껏 실천하면서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 사이 당과 왜의 요인들과도 꾸준히 교류하여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리십시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반석 같은 지위에 올라 계실 겁니다. 교기 왕자가 야망을 품고 있어도 쉽게 나서지는 못할 겁니다.”
태자는 마음을 다스리고 심복의 말을 따랐다. 그는 내심을 숨긴 채 부왕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대신들을 공경했다. 그리고 외국의 명사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당나라에서는 의자를 높이 평가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렀다. 이처럼 의자가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니 야심만만한 교기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서력 641년, 무왕이 42년의 재위 끝에 승하하자 태자 의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백제 제31대 임금인 의자왕(義慈王)이다.
의자왕은 즉위 후 성충·흥수·윤충 등의 근신을 은밀히 불러 상의했다.
“짐이 즉위한 지 이미 여러 달이 넘었는데 몇몇 대신은 여전히 복종하지 않고 있소. 더구나 그들이 교기와 몰려다니고 있으니 의심스럽구려. 그리고 왜지에 가 있는 왕제 색상(塞上)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돌아오라고 일렀건만 미동도 하지 않고 있소. 이래서야 짐의 권위가 서겠소.”
흥수가 단호한 어조로 아뢰었다.
“왕명에 따르지 않은 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아무리 폐하의 아우들이라고는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국내에 있는 교기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상응하는 조치를 하시는 게 마땅합니다.”
윤충이 나섰다.
“그자들이 폐하를 무시하고 작당하는 걸 보면 역모의 혐의가 짙습니다. 소신이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화근이 될 만한 것은 도려내야 합니다. 저에게 군사 3백을 내주십시오. 당장 달려가서 그자들을 처단하겠습니다.”
의자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성충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는 왜 아무 말도 없소?”
성충은 황송해 하며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지금 저들을 친다면 병석에 계신 태후께서 상심이 크실 겁니다. 아직 뚜렷한 역모의 증거는 없으니 사람을 풀어 감시하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게 좋겠습니다.”
의자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충의 말이 옳았다. 어머니가 와병 중인데 아우를 해치는 건 도의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후 태후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의자왕은 성충을 불러 전교를 내렸다.
“역모의 싹이 더는 자리지 못하도록 불경한 무리를 솎아 내야겠소.”
이번만큼은 성충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그는 윤충을 불러 왕제 교기와 항명(抗命)한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 지시했다.
신이 난 윤충은 나는 듯이 달려가서 교기와 연루된 자들을 빠짐없이 잡아들였다. 의자왕은 이들을 모조리 외딴섬으로 보내 유폐시켰다. 이 일로 그는 비로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 서변을 쳐서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 승리로 의기양양해진 그는 좌평 성충과 윤충을 불렀다.
신하들이 편전에 들어서자 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 장군은 대량주군(大良州郡·합천)에 있는 대야성(大耶城)에 대해 알고 있소?”
“신라 서변의 요충지가 아닙니까. 장군 품석이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야성의 병력은 얼마나 되오?”
“대략 3천 정도일 겁니다.”
의자왕이 고개를 돌려 성충에게 물었다.
“지금 치면 승산이 있겠소?”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가 지키고 있을 정도로 신라에 매우 중요한 성입니다.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보다는 꾀를 써야겠구려.”
의자왕은 성충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했다.
성충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계책을 내놓았다.
“먼저 우리 군대가 당항성(黨項城)을 친다는 소문을 내는 겁니다. 이 성은 당나라로 통하는 요로에 있어 신라에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쪽으로 군사를 집결시킬 겁니다. 이때 우리는 군사를 남동쪽으로 돌려 대야성을 기습하는 겁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의자왕은 벌써 승리를 거둔 것 같았다.
의자왕은 당항성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군사를 준비시켰다. 첩보를 접한 신라 조정에서는 여러 성에서 급히 군사를 차출해서 당항성으로 보냈다.
의자왕은 성충과 함께 1만5000의 군사를 사열한 후, 윤충에게 대장군의 인(印)을 하사했다. 윤충은 당항성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행군 이틀째 되는 날 윤충은 부장을 불러 작전을 지시하고 늙고 약한 군사 5000명을 떼어 주며 은밀히 작전을 지시했다. 부장은 지시대로 당항성을 향해 북으로 나아갔다. 대장군은 남은 정병을 이끌고 진로를 바꿨다. 그들은 대야성을 향해 동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대야성은 진흥왕 대에 흙과 돌로 쌓은 성으로, 주위에 크고 작은 성 40개를 거느린 신라 서부 최고의 요충지였다.
윤충의 군대가 대야성에 당도한 날 성주 품석은 부하 검일(黔日)의 아내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비열하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런 성품을 잘 아는 춘추가 딸을 시집보낼 때 따로 불러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금성에 있을 때는 장인 눈치를 보느라 참았지만 대야성 성주로 부임한 후로는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검일의 아내가 천하일색이란 얘기를 듣고 겁탈하는가 하면 길을 지나다가도 얼굴이 반반한 여인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욕심을 채웠다. 그렇다 보니 백성이 그를 믿고 따를 리 만무했다.
품석은 백제군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허겁지겁 성벽 위로 올라갔다. 적군의 형세를 보니 기세가 등등한 것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성 밑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성주는 당장 나와서 항복하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품석이 고심하고 있을 때 부장 서천(西川)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정병 3천이 있습니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서 성을 사수한다면 백제군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지원군이 올 겁니다.”
부장의 말을 듣고서야 품석은 마지못해 군사들에게 성을 굳게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백제군 진영에는 모척(毛尺)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대야성의 관원이었는데 품석의 악랄한 지시를 거절했다가 모진 매질을 당하고 백제로 도망친 자였다.
모척은 윤충을 찾아가 건의했다.
“대야성에 검일이라는 자가 있는데 양곡 창고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저와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입니다. 그는 성주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원한이 사무쳐 있습니다. 제가 몰래 성으로 들어가서 양곡 창고를 태우게 하겠습니다.”
윤충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했다.
“대야성을 함락시킨다면 그대의 공을 잊지 않겠소.”
다음 날 모척은 야음을 틈타 대야성으로 잠입했다. 그는 몰래 검일을 찾아갔다. 속으로 칼을 갈던 검일로서는 불감청(不敢請)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날 밤 검일은 양곡 창고 곳곳에 불을 놓았다. 건조한 가을 날씨였기에 불은 무섭게 번졌다. 불길이 치솟자 군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몰려들었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창고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뒤늦게 달려온 서천은 참담한 화재 현장을 보고 탄식했다.
“성주에 대한 원성이 높은 마당에 식량마저 사라졌으니 방법이 없구나.”
비축해 둔 양곡이 불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민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의견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대야성에는 가야계가 많아서 가뜩이나 신라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 게다가 성주의 만행으로 내심 백제군을 반기는 사람도 많았다.
성주 품석도 민심의 동요를 모르지 않았다.
품석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할 수 없다. 성벽에 백기를 올려라.”
아장 죽죽(竹竹)이 반대했다.
“아니 됩니다. 저들은 표리부동합니다. 우리가 항복한다 해도 목숨을 살려 주지는 않을 겁니다. 차라리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게 낫습니다.”
죽죽이 울며 막았지만 품석은 휑하니 자리를 떴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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