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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돌발이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세를 몰아 유성을 점령하고 싶었지만 대막리지의 지시가 있었기에 이쯤에서 전투를 마무리해야 했다. 요행으로 목숨을 건진 당나라 군사들은 허겁지겁 성안으로 달아났다.
진영으로 돌아온 고구려 장수들은 다 이긴 싸움에서 군사를 거둔 데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고돌발은 웃으며 그들을 타일렀다.
“오늘은 그저 탐색전일 뿐이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고도발은 철기병을 신성으로 돌려보낸 후에 보병들을 모아 놓고 명을 내렸다.
“이제 당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너희는 정해진 곳에서 농민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다가 당군이 나타나면 빈틈을 노려 공격하라. 너희의 임무는 적군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는 것이다.”
장수들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요서 곳곳으로 흩어졌다.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 고돌발은 남은 군사들과 함께 신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유성으로 돌아온 장검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승기를 잡았던 고구려군이 갑자기 물러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부장과 상의한 끝에 태종에게 표를 올렸다.
고구려군이 쳐들어오긴 했지만 나아가 물리쳤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장검을 영주 도독으로 삼고 요동으로 나아가 형세를 살피라 일렀다. 이와 함께 홍주(紅州)·요주(饒州)·강주(江州) 3개 주에 영을 내려 400척의 배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총관 위정(韋挺)에게 명해 강남의 양곡을 만리장성 너머 영주로 보내게 했다.
새로이 영주 도독이 된 장검이 군사를 이끌고 통정진을 거쳐 요하에 이르렀다. 때마침 폭우가 들이쳐 강물이 범람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고구려 유격대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장검은 부장과 함께 타개책을 상의했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장맛비 때문에 땅은 진흙 수렁이고 역병까지 돌고 있다. 게다가 고구려 유격대가 종종 출몰하니 걱정이 크다. 어찌하면 좋겠냐?”
부장이 도독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폐하께서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장마철에 군사를 움직인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회원진뿐 아니라 통정진도 비만 오면 매번 진흙탕으로 변합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개흙에서 누군들 원활히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산기슭 마른 땅에 진을 치고 잠시 군사를 쉬게 한 후에 상황을 봐서 진퇴를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검은 부장의 말을 옳게 여기고 산기슭에 영채를 세우고 머물렀다.
소득 없이 시간만 흐르자 당 태종은 불같이 노했다. 당장 사자를 보내 영주 도독을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장검이 어전으로 들어서자 태종은 쌍심지를 켰다.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고구려군의 군세를 탐지하라 했더니 어찌 요하에서 머뭇거리고 있느냐?”
도독이 머리를 조아리며 변명했다.
“소장이 요하 앞에서 시일을 끈 것은 앞으로 있을 고구려 원정에 대비해 일대의 지리를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요하가 범람하였기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겁니다.”
장검이 요서 지방과 요하 일대의 지도를 태종에게 바쳤다. 통정진 인근에 머물면서 태종의 추궁을 피하고자 주변 지도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노여움을 푼 당 태종은 장검을 행군 총관에 임명하고 신성을 공격하라 명했다. 왕명이 떨어졌기에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장검은 거란 군사 1만을 추가로 차출하여 요하를 건넜다.
어느덧 요동에서는 매서운 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요하가 얼어붙는 통에 당군은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장검이 신성에 도착해 보니 고구려군의 태세가 만만치 않았다. 성안에는 연개소문이 파견한 고돌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장검은 성벽 위를 향해 외쳤다.
“고구려 장군은 들어라! 내 친히 이곳까지 왔으니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성루에서 이를 내려다본 고돌발은 기가 막혀 웃었다. 지난 싸움에서 혼쭐이 났던 놈이 큰소리를 치니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고돌발은 사수에게 명해 적장을 향해 쇠뇌를 쏘게 했다. 몇 발의 화살이 연거푸 날아오자 장검은 겁을 먹고 허겁지겁 군사들 뒤로 숨었다.
얼마 후 성문이 열리더니 고돌발이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장검의 군대가 맞서 봤지만 적수가 되지 않았다. 당군은 숱한 사상자만 낸 채 영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당나라의 탐색전은 성과 없이 희생만 남긴 채 끝났다.
이 무렵 군량을 운반하던 위정 역시 곤욕을 치르긴 마찬가지였다. 당의 보급부대는 만리장성의 임유관을 넘어 요서로 진입한 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고구려 유격대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를 보고받고 울화가 난 당 태종은 위정을 파직한 후에 백의종군시켰다.
고당 전쟁
서력 644년 11월, 당나라 낙양궁에 아침부터 조정 대신들이 몰려들었다. 당 태종이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행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늘 하루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례에 참석했다.
옥좌에 앉은 태종이 결연한 표정으로 신하들을 둘러봤다.
“연개소문이 야욕을 채우기 위해 고구려의 국왕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죽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크게 돌아섰다. 지금이야말로 고구려를 토벌할 때다.”
이듬해 봄, 준비가 끝나자 태종은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강회와 영협의 군사 4만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000명을 전함 500척에 나누어 태워 바다를 건너게 했다.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한 이세적에게는 보기 6만과 난주·하주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 방면으로 나아가게 했다.
당 태종은 몸소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에서 정주(定州)로 떠났다.
정주에 도착한 태종은 주위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천하의 모든 나라가 짐에게 머리를 조아리건만 오직 고구려만은 복종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 왕은 군사의 강성함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니 후일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짐은 친히 그들을 정벌하여 후환을 없애려 한다.”
고구려는 예로부터 천손 사상을 바탕으로 자국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는 나라였다. 게다가 실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한술 더 떠 당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 태종으로서는 그러한 상대를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이었다.
영주를 출발한 이세적의 군대가 회원진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세적은 부총관인 강하왕 도종(道宗)을 위시해서 장검·장사귀 등 수하 장수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장검 장군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회원진으로 나아가시오. 그러면 요동성의 고구려군이 그쪽으로 주력군을 보낼 거요. 우리는 그 틈을 타 통정진으로 이동해 도하할 것이오. 본대가 요하를 건넜다는 소식이 들리면 남하하여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시오.”
명을 받은 장검은 군사 3만을 이끌고 회원진으로 향했다. 강가에 도착한 당군은 진을 친 후에 도하를 준비하는 척 부산을 떨었다.
첩보를 받은 요동성주 임석황(林錫黃)은 즉시 인근 성들에 파발을 띄우고, 회원진과 마주하고 있는 강변 언덕에 군사를 배치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 건너편의 당군은 강을 건너오지 않았다. 임석황이 의아하게 여기고 있을 무렵 신성에서 전령이 당도했다.
“적들이 통정진 쪽에서 요하를 건넜습니다. 지금쯤 신성을 공격하고 있을 겁니다.”
요동성주는 깜짝 놀랐다.
“아하, 당나라 놈들의 간계에 넘어갔구나.”
임석황은 수하 장수들을 소집해 머리를 맞댔다.
“저들이 회원진으로 오기에 그곳에서 강을 건널 줄 알았더니 정작 주력군은 통정진 쪽에서 요하를 건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장 신성으로 군사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장 송악(松岳)의 말에 임석황은 고개를 저었다.
“회원진 일대에 있는 당군의 형세도 만만치 않다. 만약 우리가 요동성의 군대를 나누어 신성으로 보낸다면 저들은 즉시 강을 건너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수를 쳐서 강 건너편의 당군을 공격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들을 격파한 후에 신성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송악은 나아가 싸울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임석황은 숙고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불가하다. 도하 작전엔 숱한 희생이 따른다. 저들을 무찌른다 해도 우리의 피해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성을 굳건히 지키는 게 상책이다. 신성은 결코 만만한 성이 아니다. 당군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요동성주는 건안성·안시성(安市城)·백암성(白巖城) 등지에서 지원 왔던 군사들을 각자의 성으로 돌려보내면서 오로지 수성에 전력을 기울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한편 이세적으로부터 무사히 요하를 건넜다는 통보를 받은 장검은 군사를 이끌고 하류로 내려가 강을 건넜다.
이로써 제1차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요하는 제 역할을 해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뚫렸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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