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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를 출발한 장량의 선단은 등주를 거쳐 비사성 앞바다에 당도했다. 묘도 군도에 기지를 두고 있던 고구려 초계선을 피해 멀리 돌아왔기 때문에 예상보다 늦어졌다.
장량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goT다.
“우리가 이곳까지 왔는데도 고구려의 전선은 한 척도 보이지 않는구려. 아마도 우리 선단의 규모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야.”
총관 정명진(程名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들이 해전에는 자신이 없나 봅니다. 그렇다면 비사성을 사수하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장량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비사성의 군사는 겨우 사오천 명 남짓이고, 성주 걸사비는 유약한 자라 하오. 우리가 약간의 위력을 보여 주기만 해도 성문을 열고 항복할 거요.”
이튿날 비사성 성주 걸사비는 해안가 언덕에 궁노수를 매복시키고 당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당군 4만 명이 일제히 상륙을 감행했다. 그들은 고구려 궁노수가 매복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해안에 발을 내디뎠다. 당군이 절반 정도 육지에 올라섰을 때 이를 지켜보던 걸사비가 소리쳤다.
“이때다! 모든 궁노수는 화살을 날려라!”
성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노수들이 일제히 쇠뇌를 쏘았다. 방심하고 있던 당군 진영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명의 군사가 쓰러졌다.
총관 정명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고구려 쇠뇌의 사정거리는 삼백 보 정도다. 저들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지점으로 후퇴하라.”
이에 당군들은 서둘러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비사성 성주는 공격을 중지시켰다.
걸회수가 부친에게 간청했다.
“지금 나아가서 공격하면 당군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걸사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된다. 백병전을 펼치면 당군을 무찌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 편의 피해도 클 것이다. 나는 단 한 명의 군사도 헛되이 죽게 할 수 없다. 기다렸다가 적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쇠뇌로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목표는 저들이 성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해안에 상륙하는 당나라 군사가 점점 늘어났다.
걸회수가 거듭 청했다.
“이대로 두면 저들을 막아 내기 어려워집니다. 공격하게 해 주십시오.”
걸사비는 새까맣게 몰려드는 당군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불가하다. 이 정도면 저들의 기를 꺾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돌아가자.”
성주는 징을 쳐서 군사들을 성으로 퇴각시켰다.
요동반도 남단의 금주에서 동북쪽으로 80여 리쯤 가면 대흑산이 나오고 그 위쪽에 비사성이 자리하고 있다. 성곽 둘레가 20리쯤 되는 비교적 큰 성으로, 주위가 기암절벽인 가운데 오로지 서쪽만 경사가 비교적 완만했다. 공성(功成)하는 입장이라면 성의 서쪽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장량은 몇몇 장수들을 거느리고 비사성을 둘러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완벽한 요새였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장량은 정명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비사성을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소?”
총관도 별다른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별수 없습니다. 서문 쪽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수밖에요.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 방법뿐입니다.”
부총관 상하가 끼어들었다.
“일단 부딪쳐 보면 저들의 허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소장에게 선봉을 맡겨 주십시오.”
장량은 상륙하면서 많은 군사를 잃었기에 무턱대고 공성을 하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달리 방책이 없었다.
“좋소. 공성 무기를 총동원해서 서문을 깨부숩시다.”
이튿날 아침부터 당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당나라 군사가 서문 앞에 이르자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강한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은 당군의 갑옷은 물론 방패까지 뚫어 버렸다. 당나라 군사가 일시에 수백 명이나 쓰러졌다. 이에 당군들은 무쇠로 만든 솥뚜껑으로 상체를 가리고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강력한 쇠뇌로도 무쇠 솥뚜껑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벽 위에서 바윗돌이 떨어지고 펄펄 끓는 물이 쏟아졌다.
당군은 발석차를 동원하려 했지만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높아 투입이 어려웠다. 당군이 자랑하는 공성 무기들도 천험의 요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보름 동안이나 공방전이 거듭되면서 당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정명진이 장량을 찾아와 운을 뗐다.
“아무래도 방법을 달리해야겠습니다.”
“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장량은 조바심이 나 있었다.
“비사성주의 아들 걸회수는 성미가 아주 급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못 이기는 척하며 배가 정박한 곳으로 물러가면 그자는 공을 세우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나올 겁니다. 미리 성 주위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재빨리 뛰어 들어가 성을 점령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그 임무를 맡기면 좋겠소?”
“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매복하겠습니다. 반드시 작전에 성공할 테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장량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정명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 장량은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철군을 준비하라. 해안을 따라 건안성으로 올라간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당나라 군사들은 기뻐하며 영채를 거두고 떠날 준비를 했다. 보름 동안 공격해도 끄떡없는 비사성에 신물이 났던 것이다.
성곽의 높은 망루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주 걸사비가 부관 돈황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저들이 공성을 포기하고 떠나는 모양이구나.”
돈황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야 비사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입니다.”
옆에 있던 걸회수는 잔뜩 몸이 달았다.
“당장 저놈들을 쫓아가서 도륙해야 합니다. 설마 그냥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시겠죠?”
성주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굳이 나가서 싸울 필요 없다. 수성만 하고 절대 나가서 싸우지 말라는 엄명도 있지 않았더냐.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있어라.”
걸회수는 투덜거리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정오를 넘어서자 철수 준비를 마친 당군이 대오를 갖추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에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장대비가 내렸다.
걸회수는 울분을 풀기 위해 수하들과 술판을 벌였다.
“이것들을 박살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곱게 돌려보낸단 말이냐. 왜 그리 겁이 많은지. 아버지도 이제 늙으신 게야.”
수하들도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 말입니다. 당장 성문을 열고 나가서 당나라 놈들을 부숴 버리고 싶습니다만….”
걸회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둘러봤다.
“우리가 나가서 도망치는 적군을 쫓아 도륙하는 게 어떻겠냐?”
혈기왕성한 청년 장수들이 앞다투어 동조했다.
술기운이 오른 걸회수는 멋대로 기마병 5백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후퇴하는 당군을 쫓았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돈황은 크게 당황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는 휘하 군사를 이끌고 부리나케 걸회수를 뒤쫓았다.
이때 걸회수는 50여 리를 달린 끝에 당군의 후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신이 나서 외쳤다.
“이놈들 게 서라!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가려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장대비까지 내려 스산한데 웬 황소 같은 놈이 달려와 고함을 치니 당군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사분오열하며 달아났다.
걸회수가 도망치는 당군을 쫓느라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돈황의 군대가 나타났다.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는 군령을 어기는 일입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걸회수가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저들을 보시오. 하나같이 오합지졸이지 않소. 그런데 무엇을 겁내 순순히 보내 준단 말이오.”
걸회수가 말을 듣지 않자 돈황은 엄한 얼굴로 경고했다.
“자꾸 이러시면 군령에 불복종한 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성주의 아들이라도 군령 앞에서 자비란 없었다.
걸회수는 투덜거리면서 비사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한참을 달려 비사성 서쪽 성문에 당도한 걸회수는 문을 열라고 외쳤다.
이때 성벽 위에서 횃불이 일더니 당장 정명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회수야, 어서 오너라. 네 덕에 성을 차지했으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그제야 걸회수는 적의 계략에 빠졌음을 눈치챘다. 사지가 떨려 왔다. 자신들이 군사를 이끌고 나간 사이 당군이 성을 재빨리 점령한 것이었다.
걸회수 앞에 무언가 날아와 떨어졌다. 가만히 주워 보니 아버지 걸사비의 머리였다. 걸회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망연자실 눈앞이 아득했다. 그는 슬픔이 북받쳐 올랐지만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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